[오늘의 성인] 노리치의 줄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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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노리치의 줄리안
  • 김신윤주
  • 승인 2016.05.09 12: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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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가 (1342-1416)

“진실로 하느님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마찬가지로 진실로 하느님 당신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뜻을 가지시고, 우리의 어머니가 일을 하시며, 우리의 좋으신 주 성령께서 증거하십니다.”

Bd. Julian of Norwich

14세기 후반은 끔찍한 격변의 시대였다. 흑사병과 100년 전쟁, 그리고 교황이 두 명이나 생겨 발생한 교권의 위기, 이처럼 불안한 공기가 유럽대륙을 짓누르고 있었다. 개인의 영적 구원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은 교회와 교리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했으며, 이는 새로운 양상의 종교적 확산을 불러 일으켰다. 대부분의 새로운 영성은 전통적인 교단의 바깥에서 성스러운 삶에 대한 열망을 품은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믿음에 대한 갈망은 평신도의 공동체 생활과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꽃을 피웠다. 14세기의 영국은 지역마다 각종 방언으로 쓰인 수많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진술들을 낳았다. 이런 대부분의 신비주의 작품은 평신도 은수자들이 썼으며, 이런 작품들은 하느님과의 각별한 관계를 갈망하는 다른 신자들에게 전달되었다. 노리치의 줄리안의 저서도 그 중에서 하나인데, 아마 가장 위대한 글로 알려졌다.

줄리안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만 알려져 있다. 그녀의 이름은 정확하지 않다. ‘줄리안’이라는 이름은 말년에 그녀가 봉쇄 은수자로 머물던 노리치의 성 줄리안 교회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말 그대로 교회의 담장에 딸린 봉쇄 은둔처에서 여성 은수자로 살았다. 그 공간에는 음식을 주고받고 영적 상담을 원하는 손님들과 대화도 나누고 교회 안쪽의 전망도 볼 수 있는 바깥 창문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고양이와 다정하게 정원을 즐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밖에 그녀에게 주어진 삶은 오로지 기도와 관상에 헌신하는 생활이었다.

오늘날에는 세상과 단절된 극단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시대에는 은수생활이 중요한 사회적 역할로 인정받았다. 그녀의 글들은 은수자라는 고독한 존재가 맺은 열매로서 깊은 사랑과 연민을 증언하고 있다. 그밖에 그녀의 생애에 대한 세세한 부분들은 그녀의 작품 <계시>를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다.

그분의 십자가, 선하신 하느님의 깊이 

줄리안(Bd. Julian of Norwich)은 1342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하느님께 세 가지의 은총을 청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은혜이고, 두 번째는 신체적인 질병, 그리고 세 번째는 하느님의 ‘세 가지 상처’라는 통회의 상처, 연민의 상처, 하느님을 갈망하기 때문에 받는 상처였다. 그녀는 서른 살 되던 해 심각한 병으로 쓰러져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던 중에 이 청원에 대한 응답을 얻는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대신에 누운 채로 환시로 나타난 십자가를 응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16번의 뚜렷한 계시를 경험했고, 병은 완전히 나았다. 그녀는 이 계시들을 20년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두 가지 버전으로 기록했다.

줄리안은 최초의 계시에서 그리스도의 왕관을 바라보던 인상을 임상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했다. “붉은 피가 왕관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뜨겁고 자유롭고 풍부하게 살아있는 물줄기였다.” 그런데 “무시무시하고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그 피는 상냥하고 사랑스러웠다.” 이런 식의 예상 못할 형용사로 연결된 묘사는 줄리안 작품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그녀에게 십자가는 공포와 고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호의’와 극도의 ‘겸양’ 이라는 ‘위안’의 원천이 되었다. 가장 높은 분으로 여겨지는 이가 그 십자가에서 가장 낮은 사람의 몫을 받았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낮춰 다른 사람들의 종이며 친구가 된 이에게 왕의 영광을 주었다. 그녀는 물리적으로는 피가 흐르는 머리를 보면서 영적으로는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의 깊이를 들여다보았다.

이 하나의 비전은 신학적 영역에서 매우 독특하고 풍요로운 토양이 되었다. 피조물의 가치, 속죄의 힘, 그리고 악의 무력함 등의 개념은 다양하고 유연한 시각들을 불러들였다. 피조물은 하느님 손바닥 안에 놓인 한 알의 개암나무 열매에 불과하다. 물리적으로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 가치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과 피로 지불한 가격에 따라서 측정된다. 따라서 어둠의 심장부를 응시한다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선하심이라는 신비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하느님께서 모든 이들의 약함과 죄를 짊어지고서 이 세상을 위해 고통을 받았으니, 그 사랑 때문에 작디작은 우리 인간의 가치가 그만큼 커졌다. 그리스도의 피가 그 값이었다. 그리고 결국 하느님의 고통은 기쁨이 되었다. 우리의 보호자인 창조주는 또한 우리의 연인이요, 모든 면에서 선하게 일하고 계신다. 기쁨과 자비의 순리는 그리스도가 고통을 통하여 왕관의 영광을 받기 전에 이미 정해져있었다.

“몸과 영혼으로 된 우리는 하느님의 선함을 입고, 그것으로 온통 감싸여 있는 존재입니다.”

진정한 어머니 하느님

줄리안의 작품에는 현대적 영성의 심장부에 직접 와 닿는 주제들이 많다. 그중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이 하느님의 여성적 이미지이다. 줄리안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이라는 자궁을 통해 우리를 직접 낳으시고, 그의 살로 우리를 먹여 키우신 우리의 진정한 어머니이시다. 그녀의 글이 피조물의 선함과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아름답고 호의적인 사랑의 하느님을 강조하는 부분은, 죄 많은 세상에 분노하시는 분, 권능으로 심판하시는 하느님을 강조하는 세속의 신학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줄리안은 그 당시 벌어진 정치와 교회의 위기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그 시대의 문제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고 말할 수 없다. 불안과 불확실함이 난무하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에 대한 확신과 고통의 의미, 그리고 하느님의 전능함과 선하심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줄리안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직접적으로 주었다.

줄리안이 보여준 통찰은 이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의 고통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며, 또한 우리를 살아가게 도우시고 결국에는 우리와 하나가 되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죄가 아닌, 이 사랑이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다. 악은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고통을 받더라도 하느님은 이미 그 고통을 겪으셨다. 그녀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최악의 상황은 이미 벌어졌고 또한 이미 회복되었다.”

현세는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함께 겪는다면, 하늘나라에서도 그분의 기쁨도 나누어 가지리라 기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줄리안은 가장 유명하고도 독특한 말을 남긴다.

“잘 될 것입니다. 잘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입니다.”


Shine Shin-Kim, 김신윤주 수산나.
아티스트, 작가. 뉴욕에서 대중참여예술인 원하트 프로젝트 시작. 한반도의 평화와 인권, 사회정의, 위안부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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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킹 2016-05-09 21:58:12
좋은 정보와 나눔 고맙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