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 피터 모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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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피터 모린
  • 김신윤주
  • 승인 2016.05.0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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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운동 공동 창설자
피터 모린

“우리가 ‘지금여기’를 다르게 만들면 미래가 달라질 것입니다.”

피터 모린(Peter Maurin)은 1877년 5월 9일, 남프랑스의 오래된 지역인 랑그독에서 태어났다. 23명의 형제들 중 한명이었고, 부모는 1500년 동안 경작한 땅에 대한 소유권 반환을 주장하는 소작농이었다. ‘그리스도 형제단’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가톨릭 인민주의(Catholic Populism)의 분위기를 호흡했다. 피터 모린에게 가톨릭일꾼을 낳은 사상은 1909년 북아메리카로 향하기 전부터 이미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미국으로 건너 온 모린은 20여 년 동안 온갖 막노동을 다하며 떠돌았다. 마치 ‘가난’을 자신의 신부로 끌어안았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저잣거리의 싸구려 음식점에서 식사하고 어디든 몸을 눕힐 수 있는 곳에서 잠을 잤다. 약간의 돈이 손에 들어오면 피터 모린은 언제나 책을 사거나 좀 더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그 사이에도 모린의 마음은 다른 곳을 꿈꾸고 있었다. 바위를 깨고 신작로를 닦는 거친 일을 하면서 미국을 떠도는 가운데, 피터 모린은 오로지 가톨릭 사회철학을 통해 세상을 재구성하려는 자신만의 ‘노동’에 골몰해 있었다.

모린은 사회와 경제, 정치질서가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는 인간 활동의 궁극적이며 초월적인 목적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어버렸다. 사회적 삶은 사람들 모두가 온전히 성장하는 것보다는 생산과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조직되고 이어져왔다. 인류는 하느님의 공동 창조자가 아니라 어느 기계의 소외된 톱니바퀴처럼 되어버렸다. 그의 관점에서, 교회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지녔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 이러한 ‘영적 다이너마이트’는 본래 복음서에 있는데, 성직자들은 그것을 단단히 묶어서 가둬두는 길을 선택했다. 필요한 것은 그 다이너마이트의 ‘안전핀 덮개를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모린의 프로그램은 ‘오래된 과거라는 껍질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라는 ‘인격주의 혁명’이었다. 정확하게 ‘객관적인 상황’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 오히려 새롭게 깨달은 복음적 가치들을 지금 당장 즉시 살아가는 게 필요하다고 여겼다.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만일 우리가 지금을 다르게 만든다면”

그는 자신의 생각을 거리 모퉁이에서 낭독하기 위해 <읽기 쉬운 에세이>로 정리해 두었다.

세상은 더 부유해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사람들은 더 좋은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더 부유해지려는 노력을 멈춘다면.

피터 모린은 둔탁한 프랑스 억양의 허름한 행색이었지만 번뜩이는 예언자적 비전을 가진 사나이였다. 그는 자신의 비전에 따라 변화를 일으키는 큰 행동으로 옮겨 담는 것보다, 오히려 체계적인 원칙으로 정립하는 데 탁월했다. 그리고 모든 변화는 1932년, 가톨릭 개종자이자 급진적인 사회운동가였던 젊은 여성 저널리스트 도로시 데이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회적 실천과 신앙을 어떻게 결합해야할 고민하면서 해답을 구하기 위해 기도해 왔다. 피터 모린이 첫 만남에서 몇 분 동안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을 때, 도로시 데이는 자신이 갈망해 왔던 기도에 대한 응답을 찾았다고 믿었다.

모린은 ‘사고의 정화를 위한’ 신문 발행을 포함한 세 가지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애덕의 실천을 위한 ‘환대의 집’을 운영해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헐벗은 이들을 입히는 것이다. 그리고 탈중심주의를 향한 첫 번째 발걸음인 농경공동체의 건립, 그리고 코뮌경제와 ‘인간이 좀 더 쉽게 선해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언론사 기자였던 도로시 데이는 즉시 첫 번째 제안에 응답했다. 그 결과물이 1933년 5월 1일 뉴욕 유니언 광장에서 처음으로 배포된 <가톨릭일꾼> 신문이다. 이 신문은 서서히 농촌과 도시 지역에 사회적 기반을 둔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산상설교의 급진적인 진복팔단(眞福八端)의 정신으로 충만한 <가톨릭일꾼> 신문은 자발적인 가난, 공동체,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맺는 연대, 그리고 복음적 비폭력 등의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알렸다. 가톨릭일꾼운동은 미국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였으며, 봉사자들과 헌신적인 활동가들의 숫자에 매이지 않고 미국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가톨릭일꾼운동의 메시지는 도로시 데이와 거의 동일시 되어 왔지만, 도로시 데이 지신은 늘 피터 모린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훗날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만일 피터 모린이 ‘매디슨 스퀘어 가든으로 가서 이 생각을 알리세요.’ 라고 내게 권했다면, 나는 그것이 비록 ‘십자가의 어리석음’ 이고 실패할 운명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스스로 그 실패를 안아 승리로 바꾸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모든 공포감을 극복하고 그 어리석음을 행했을 것입니다.”

피터 모린은 마침내 도로시 데이를 통해 그의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며 살았다. 그러나 가톨릭일꾼운동과 함께 한 그의 삶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1949년, 모린은 72세로 이승을 떠났다. 모린은 생애의 마지막 5년을 침묵과 허약함 속에서 보냈다. 몸과 정신에 장애를 남긴 뇌졸중으로 모린은 안타깝게도 “생각할 수가 없는” 상태로 지냈다. 도로시 데이는 그의 고귀한 죽음의 자세를 영적인 차원에서 정리하였다.

피터 모린은 한평생 가난한 자로 살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내려놨고, 마지막에는 그가 가졌던 단 하나의 소중한 것(사고능력)마저도 제거되었다. 이 예언자적 사나이는 갓난아이처럼 입혀지고 먹여졌다. 그러나 그는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고, 하느님 은총 안에서 인내로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였다. 피터 모린은 죽기 몇 년 전에 며칠 동안 실종되어 일꾼공동체 식구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마침내 다시 그가 돌아왔을 때에, 모린은 여전히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즐거운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다. “마치 버스를 타고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 이후, 모린의 양복 윗도리에는 작은 메모 하나가 옷핀에 달렸다.

“나는 가톨릭일꾼운동의 창립자인 피터 모린입니다.”


Shine Shin-Kim, 김신윤주 수산나.
아티스트, 작가. 2013 년 뉴욕에서 대중참여예술인 원하트 프로젝트 시작,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한반도의 평화, 물신주의와 신자유주의, 인권, 사회 정의 차원에서의 위안부 문제 등을 다루며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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