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톰의 시대, 우리는 모두 우주소년 아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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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톰의 시대, 우리는 모두 우주소년 아톰이다
  • 장준식
  • 승인 2026.07.27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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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식 칼럼

우주소년 아톰. 어린 시절 손에 땀을 쥐며 보던 만화영화다. 아직까지도 몇몇 장면은 눈에 선하다. ‘우주소년 아톰’은 우리나라에서 방영될 때의 제목이고, 일본 원작의 제목은 ‘철완 아톰(鉄腕アトム, Tetsuwan Atomu)’이다. 영어권에서는 ‘Astro Boy’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미국에 온 후에는 어린 시절 TV에서 재미있게 보던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찾아보곤 했다. 우주소년 아톰 외에도 서부영화 ‘내 이름은 튜니티’를 찾아보았다. 영어 원제는 ‘My Name Is Trinity’였다. 트리니티를 ‘튜니티’로 옮긴 것이다. 또한 ‘A 특공대’도 찾아보았는데 원제는 ‘The A-Team’이다. ‘전격 Z 작전’의 원제는 ‘Knight Rider’이다. 비디오 CD를 구입하여 모두 다시 보았다. 지금 봐도 재미있다.

아톰(atom)은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원자’를 뜻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어 ‘atomos’는 ‘나눌 수 없는 것’,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주소년 아톰 역시 원자력 에너지를 사용하는 로봇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스어 ‘atomos’가 ‘나눌 수 없는 것’을 뜻한다면, 이에 대응하는 라틴어가 ‘individuum’, 곧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어의 ‘individual’이 나왔고, 이것을 한국어로 ‘개인’이라 번역한다.

중세 철학의 중요한 논쟁 가운데 하나는 ‘보편(universal)’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를 둘러싼 보편논쟁이었다. 실재론(realism)은 우리가 ‘인간’, ‘선’, ‘아름다움’과 같은 보편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단지 인간이 붙인 이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실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는 이러한 실재론적 사고에 중요한 철학적 토대를 제공했다. 개별적인 존재들 너머에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보편적 형상과 본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실재론적 사고가 신학과 만나면 모든 존재의 근원과 궁극적 실재로서 하느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형상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삶을 비추어 볼 중요한 기준이 된다.

중세의 이러한 실재론에 도전장을 던진 흐름 가운데 하나가 유명론(nominalism)이다. 유명론은 보편적 실체보다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실재론이 보편성에 무게를 두었다면, 유명론은 개별성에 좀 더 주목했다.

유명론이 확산되던 후기 중세의 지적 환경은 종교개혁이 등장하게 된 여러 사상적 배경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물론 유명론이 종교개혁을 낳았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후기 중세와 종교개혁을 거치며 개별 인간의 신앙과 양심, 판단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졌고, 이러한 흐름은 계몽주의와 근대 시민사회를 지나면서 ‘개인’이라는 근대적 주체의 형성으로 발전해 갔다.

개체, 즉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인의 자유와 판단이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원리가 된 시대를 우리는 ‘근대’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는 한마디로 ‘개인을 발견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근대 이전의 인간도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선택했다. 그러나 오늘날과 달리 개인의 자율성이 삶의 최종적인 규범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전통과 공동체, 종교와 성서처럼 자기 바깥에서 주어진 권위가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데 훨씬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상징되는 근대의 전환 이후, 인간은 삶과 지식의 정당성을 전통과 외적 권위에만 맡기지 않고 사유하는 주체 자신의 이성에서 찾기 시작했다. 자기 안에 있는 것, 즉 이성이 삶과 세계를 판단하는 중요한 규범으로 등장한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에게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그래서 전통이나 성서만이 아니라 ‘이성’이었다. 이성이 왕이 되었다. 근대 이후의 서구 사상은 어쩌면 이성의 역사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성과 함께 웃고 울었다.

원자의 개념을 처음 체계적으로 생각한 그리스 철학자는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였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고안한 ‘원자(atomos)’, 곧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이 거의 2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근대에 이르러 또 다른 방식으로 꽃을 피웠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라는 원자의 이미지가, 더 이상 다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 존재, 곧 ‘개인(individual)’을 생각하는 데 절묘하게 겹쳐진다.

개인이 발견된 근대 이후, 우리는 진짜로 ‘아톰(atom)’이 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톰이다. 아톰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인은 이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 인정받는다. 권리와 인권을 가지며, 자신의 삶에 관한 기본적인 결정권을 가진다. 그래서 근대 이후 서구 사상은 아톰, 즉 개인이 된 인간 개체들이 다른 아톰들과 어떻게 잘 어울려 살아갈 것인가, 무엇이 ‘좋은 삶’인가를 묻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우주소년 아톰이 힘이 센 것처럼 한 명 한 명의 인간 개체는 주체성과 권리를 바탕으로 힘을 가지게 되었다.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사적 영역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재산(property)을 소유하며, 자신의 생각과 신념과 삶의 방식을 선택할 자유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힘과 힘은 잘 조절되지 않으면 충돌한다. 각자가 자신의 권리와 자유만을 앞세운다면 아톰과 아톰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근대 정치철학은 끊임없이 질문했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어떻게 공멸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가.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는 어디에서 만나야 하는가. 개인의 권리와 공동체의 정의는 어떻게 함께 세워질 수 있는가. 롤스의 자유주의 사상이나 하버마스의 ‘공론장(public sphere)’ 개념 역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소통’이 강조되는 이유도 바로 ‘아톰의 시대’에 아톰과 아톰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성과 권리를 바탕으로 자유를 소유한, 또는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는 인간 개체는 이제 상당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힘을 정의롭게 쓰는 법도 배워야 한다. 예를 들자면, 예전에는 집에 자동차가 한 대뿐이고 가장만 운전할 줄 알면 되었다면, 이제는 가족 모두가 자기 자동차를 가진 것과 같다. 자동차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운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유와 권리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유를 손에 쥔다는 것, 권리를 손에 쥔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에게 칼을 쥐여 주는 것과 같다. 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칼을 쥔 사람이 아직 어린아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쓰일지 무척 걱정스럽다. 손에 쥐어진 칼을 ‘정의롭게’ 쓰려면 ‘성숙’이 필요하다.

만화영화에서 우주소년 아톰이 자신이 지닌 힘을 정의롭게 쓰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아톰들도 자신의 손에 쥐어진 자유라는 칼, 권리라는 칼을 정의롭게 쓰기 위해 성숙해지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의 발견은 좋은 것이다. 개인은 충분히 발견되어야 한다. 자신의 삶에 관한 기본적인 결정권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누구도 한 사람의 주체성과 자유를 함부로 빼앗아서는 안 된다. 만약 누군가 정당한 이유 없이 자기 결정권과 자유를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아톰들은 각자가 ‘충분한’ 아톰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나의 자유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돕는 것. 나의 권리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권리도 침해받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 아마 이것이 아톰의 시대가 요구하는 성숙일 것이다.

그러나 아톰들은 동시에 철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책임 없는 자유는 주체성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욕망과 충동에 끌려다니게 만든다.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욕망과 분노, 두려움과 편견에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살아갈 수도 있다.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 어마어마한 일을 잘 해내려면 갖춰야 할 ‘덕성(virtue)’도 참 많다.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하고, 나의 권리만큼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힘을 가졌다면 그 힘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래서 아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아하지만 피곤하다. 그래도 지치지 않기를. 각자의 자유를 지키면서도 서로의 자유를 지켜주기를. 아톰의 힘과 우아함을 잃지 않기를.

 

장준식 목사
미국 실리콘밸리 소재 세화교회 담임.
<예배자의 기도>, <기후 교회로 가는 길> 등의 저자.
여러 신문에 글을 기고 하는 칼럼니스트
미국 에모리대학교와 GTU에서 조직신학(정치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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