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비참함에서 벗어나 우아한 삶을 살게 된, 존재의 상승일 수 없다. 구원이 이렇게 사유되면 차등이 발생한다. 구원받은 자의 삶이 우월해진다. 이것은 전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사유해야 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공적인 선포이다. 구원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니다. 대속으로 사유하면 구원은 티켓이 되고 만다.
대속을 말하더라도, 그것은 거래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 안에서 다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셨다는 말은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을 누군가 대신 지불했다는 상업적 계산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폭력과 죄와 죽음의 자리까지 그리스도께서 함께 내려오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을 통과하심으로 우리를 그 고통 밖으로 빼내신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 우리를 사랑의 길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구원은 면제권이 아니라 참여의 부르심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과 다른 계급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은 “나는 이제 안전하고, 너는 아직 위험하다”는 종교적 우월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구원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려 더 이상 타인을 죄인 취급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남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자리로 함께 내려가는 사람이다. 십자가는 인간을 상승시키는 사다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더 고상한 존재로 꾸미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기 의로 무장하는지를 폭로한다.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있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타인을 지배할 수 있으며, 진리를 말하면서도 다른 이를 모욕할 수 있다. 복음은 바로 이 자기 의(righteousness)의 구조를 무너뜨린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한다는 것은 내가 더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더 이상 나의 의로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관계의 회복이다. 다시 말해, 구원은 화해(reconciliation)이다.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피조세계와의 관계가 다시 사랑 안에서 열리는 사건이다. 죄는 인간 존재 자체의 본질이 아니라, 관계를 왜곡하고 생명을 닫아버리는 권세이다. 그리스도는 그 권세를 십자가 위에서 폭로하셨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죽였지만, 하느님은 그들을 저주하지 않고 용서의 길을 여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죄인을 골라내는 기준이 아니라, 죄의 권세가 더 이상 마지막 말이 아님을 선포하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특권 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해야 할 일은 정죄가 아니라 증언이다. “우리는 구원받았고 너희는 멸망한다”가 아니라, “하느님은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전도는 타인을 굴복시키는 일이 아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미 그 사람의 삶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을 겸손히 알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말보다 먼저 태도이고, 설득보다 먼저 환대이며, 교리보다 먼저 사랑이다.
구원은 도피가 아니다. 구원은 이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가는 표(ticket)가 아니다. 구원은 이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라 살아가도록 우리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을 혐오하지 않는다. 몸을 부정하지 않는다. 문화를 무시하지 않는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세계 안에서, 그 세계의 신음에 귀 기울이며, 사랑의 방식으로 살아가려 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존재의 상승이 아니라 사랑의 참여이다. 구원은 타인보다 우월한 자리가 아니라 타인의 아픔 곁에 서는 자리이다. 구원은 나 혼자 안전해지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세계를 함께 사랑하도록 부름받는 일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구원받은 자의 우월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린 자의 겸손(케노시스/자기비움)이다. 그 사랑에 참여할 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우게 된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게 될 때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지 무슨 매직이 아니다. 그러니, 아주 작은 일부터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 주께서 힘주시리!
장준식 목사
미국 실리콘밸리 소재 세화교회 담임.
<예배자의 기도>, <기후 교회로 가는 길> 등의 저자.
여러 신문에 글을 기고 하는 칼럼니스트
미국 에모리대학교와 GTU에서 조직신학(정치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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