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상태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 장준식
  • 승인 2026.06.28 15: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준식 칼럼

정현종 시인의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전문이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ㅡ부ㅡ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연세 인문학 아케이드에서 정현종 시인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그중에서도 ‘어조’에 대한 이야기가 오래 남았다. 시인은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조’라고 말한다. 곱씹어 보니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어조란 화자, 곧 작가의 목소리이며, 다르게 말하면 사물을 대하는 태도다. 글의 어조에는 작가가 세계를 대하는 자세가 고스란히 담긴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수려한 문장으로 쓰인 글이라도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비뚤어져 있으면 그 글은 금세 공허해진다.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글이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곧 사물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그 글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소리를 낼 뿐,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

시인은 이 시가 연애시가 아니라 ‘중생들’, 곧 대중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매지 캠퍼스로 강의하러 가는 길, 버스 안에서 마주한 풍경을 담은 시라고 했다. 그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흐르던 사랑의 기운을 포착해 쓴 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마음이 사랑에 물들어 있을 때는, 보따리에 들어 있는 밤에서도 밤꽃이 핀다.”

케이트 디카밀로의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손녀 애빌린은 밤마다 할머니 펠리그리나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른다. 어느 날 할머니는 흑멧돼지로 변한 공주 이야기를 들려준다. 숲으로 도망친 공주는 마녀의 집에 들어가고, 마녀는 묻는다.

“넌 누구를 사랑하지?”
공주는 대답한다.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요.”
그 순간 마녀는 말한다.
“넌 날 실망시키는구나.”

그리고 주문을 외우자, 공주는 흑멧돼지로 변한다.

숲으로 도망친 흑멧돼지는 왕의 부하들에게 사냥당하고, 요리사는 그 배를 가른다. 그 속에서 공주가 삼켰던 구애자의 반지가 나온다. 요리사는 요리를 하며 그 반지를 손가락에 낀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다.

화를 내며 애빌린이 말한다.
“끝이에요? 너무 빨리 끝났잖아요. 그리고 행복하게 살지도 않잖아요.”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답한다.
“하지만 말해 보렴.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이야기가 행복하게 끝날 수 있겠니?”

정현종 시인은 말한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역설이라고. 사랑은 그만큼 귀한 것이고, 사랑은 보따리 안에서도 꽃을 피우며, 죽은 것마저 다시 살아나게 한다. 그렇다.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이야기가 행복하게 끝날 수 있을까. 사랑이 없으면 눈앞에 있는 가장 좋은 것조차 쉽게 망가진다. 반대로 사랑이 있으면,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아름다움은 피어난다.

그래서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조’이듯,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도 ‘태도’다. 사물과 타자를 대하는 태도. 바울은 필리피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영어 성경은 이 ‘마음’을 attitude, 곧 태도로 번역한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마음이란,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윤동주의 시 한 구절이 스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이 땅에 창궐하는 악과 고통이 하루속히 멈추기를, 주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장준식 목사
미국 실리콘밸리 소재 세화교회 담임.
<예배자의 기도>, <기후 교회로 가는 길> 등의 저자.
여러 신문에 글을 기고 하는 칼럼니스트
미국 에모리대학교와 GTU에서 조직신학(정치신학) 전공

종이신문<가톨릭일꾼>(무료)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

Tag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