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장의 인사권 행사, 왜 이리 불친절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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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장의 인사권 행사, 왜 이리 불친절하냐
  • 김유철
  • 승인 2019.08.17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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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의 Heaven's Door

창조주의 작품과 교구장의 인사권. 이것은 분명히 비교가 될 수도 없고, 비교가 되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창조주 하느님이 하신 일과 교구장 주교가 하는 일의 모습이 너무도 대조적이기에 하는 말이다.

‘원죄’는 해석이 아니라 기록이다.

천주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경>의 창세기 3장 제목은 ‘인간의 죄와 벌’이다. 영어 성경(New American Bible)에서는 ‘Expulsion from Eden’으로서 ‘낙원에서의 추방’이라 할 수 있다. 창조주는 천지창조를 한 후 최후의 작품으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2.7)고 전한다. 그러나 창조주가 빚은 ‘사람’과 그의 협력자 ‘여자’는 창조주가 금지한 일을 하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내치움’(expelled: 창세 3.24)을 당한다.

창조주에 의한 최고의 작품이며 최후의 작품에 대한 ‘만들어짐’과 ‘내치움’의 과정에 대해서는 창세기에 서술되어 있다. 성경의 저자는 남자와 여자와 함께 꼬드김을 유도한 뱀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성경에 새겨놓았다.(창세 2-3장)

이 때문에 첫 사람은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영예와 함께 그 죗값을 세상 끝 날까지 가지고 갈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뒷사람들은 최초의 인간이 한 하느님에 대한 불순명의 행위를 ‘원죄’(Original Sin)라 부르며 후일의 경계와 지표로 삼고자 했다. 물론 그 기록은 논픽션이나 다큐가 아니라 하더라도 성경 저자의 상상만은 아닌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기에 성령의 감도라 하지 않는가.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인사권’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

한국 천주교회를 구성하는 교구는 16개 교구다. <2018 한국 천주교회 통계>를 신자수로 보면 서울교구, 수원교구, 인천교구의 순이고, 사제수로 보면 서울교구, 대구교구, 수원교구 순이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별천지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 사는 세상이다. 그러기에 신자도 그렇고 사제가 많다보면 그만큼 많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당연히 자신에게 소임으로 부여된 교구를 책임지는 교구장 주교의 어깨는 그만큼 무거워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구운영에 대하여 교구를 함께 이루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를 만족시키는 교구운영은 이상일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지만 ‘원죄’를 지닌 인간들이기에 하는 일은 허점투성이며, 잘해야 선한 마음으로 쳇바퀴 돌리는데 불과하다. 문제는 모두가 한번쯤 가지게 되는 사제 인사에 대한 것 또한 함께하는 교구운영에 대한 관심이거나 의문이거나 의혹이다. 그런데 그 인사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가득한 것이 또한 부지기수다.

인사권에 ‘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인가?

“사제 인사이동 때가 되면 누구나 궁금해 한다. 본당에서 본당으로 이동하는 사제도 있고, 학교나 병원 등 특수한 소임을 받고 이동을 하기도 한다. 허나 인사발령장에 들어있는 내용은 분명 한글이지만 해독할 수 없는 코드들이 들어가 있다. 그것은 해당 사제들에게는 벌칙과도 같은 정직· 휴직· 면직· 제적과 같은 명령이고 교구민들을 멍하게 만드는 불투명한 발표이다.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 법정구속자에게 조차 ‘안식년’이란 용어를 쓰고, 그를 다시 수개월 만에 본당 주임으로 발령하는 무소불위의 인사발령을 할 수 있는 게 교구장의 인사권이라면 이것은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제 인사발령에 대해서는 ‘왜’라고 물으면 안 되는 걸까?”(참조1) 지금은 21세기하고도 20년이 지났다.

젊은 부제가 ‘면직’이 되고, 동작그만과도 같은 ‘대기’라는 명령을 받았던 신부가 ‘정직’으로 한층 더 어두운 명령을 받고, 정직 중에 있던 신부가 곧바로 ‘은퇴사제’가 되는 인사발령은 참으로 민망함을 넘어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위에 적힌 정직· 휴직· 면직· 제적 외에도 다른 인사처분에 대하여 해당사제는 교구법원이나 관구법원에 이의를 신청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교회법원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더욱 오리무중이다. 설령 해당사제가 자신에게 내려진 인사에 대하여 소명하거나 저항(?)할 최소한의 길도 있겠지만 사제와 관련된 많은 평신도들, 나아가 교구민들은 그저 유투브에도 나오지 않는 ‘카더라’ 방송 외에는 알아볼 길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창조주의 첫 인간도 ‘내치움’을 당할 때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성경의 저자는 부끄러움을 넘어 기록했다. 그 부끄러움을 통한 경계와 지표가 훗날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우리는 거룩한 부활찬송 (EXSULTET)을 부르며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라며 놀라운 해석을 행하기도 하는 신앙인들이다.

 

대구대교구 8월 13일자 교구 사제 인사 발령 공지
대구대교구 8월 13일자 교구 사제 인사 발령 공지

‘인사권’을 친절히 합시다. 누구를 위해서?

우리가 ‘교회’라 부르는 종교를 산업분류로 하자면 무엇이 될까? 고민할 바 없이 그것은 ‘서비스업’이다. 서비스업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고 그 대가를 받는 산업’이라고 부르며 ‘숙박업 · 수리업과 함께 종교 · 교육 · 법무 및 그 밖의 비영리 단체’ 등이 이에 포함된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위에 열거한 업종을 유심히 보면 교회와 더불어 모두 사람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업종들이다.

교회는 찾아오는 손님들과 교회를 구성하는 자신들에게 더욱 친절해져야 하고 낮아져야 한다. 그것이 73권의 성경을 한마디로 요약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풀이한 말일 것이다. 교구장 인사권이 특별히 한사람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혹의 눈은 도처에 있기도 하다.

인사권 공론화, 창조적 실천을 향하여

한 사제는 이렇게 말했다. “사제들은 체제상 주교에게 종속되어 있고, 주교들은 교황에게 종속되어 있는 이른바 현재의 중앙집권체제는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복음, 사도행전,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 등 신약성경 그 어느 하나에도 기초하지 않은 성경 밖의 문화와 정치 제도에 기인하고 있는 역사적 산물일 뿐입니다.”(참조2)

인사권자인 교구장 주교가 소속사제들에게 정직· 휴직· 면직· 제적이라는 고민스러운 인사발령을 함에 있어서 그 내용을 교구민에게 공개하자는 것이 본 칼럼의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현재처럼 일방적이고 폐쇄적인 인사권에 대한 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고민하고 논의해야 할 이른바 ‘공론화’가 필요한 일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정체성은 고정화 되어 있거나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정체성의 본질은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새롭게 탄생되는 것이며 창조적 실천이다.”(참조3)

참조

1.<가톨릭프레스> 2018년2월6일 사제인사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나. 김유철
2.<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0년11월2일 사제와 주교들이 청문회에 선다면. 함세웅
3. 『담론』 (신영복. 돌베개. 2015. 198쪽

 

김유철 스테파노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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