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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고소하는 재미없는 교회

[김유철의 Heaven's door]

고발인은 누구인가?

살다가 가장 피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고소나 고발이라는 것이다. 한번 소송이라는 것에 휩쓸리면 정신적, 육체적, 금전적인 피해는 물론이지만 세상사에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일이다. 사실 고소니 고발은 요즘 와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사회의 한 모습이었던 모양이다. 성경에서 ‘고소, 고발’과 관련된 문장이 70여 회 이상 검색되는 것으로 보아 성경마저도 외면할 수 없던 문제였고 예수와 관련한 고소 고발도 15회나 나온다.

얼마 전 대구대교구가 자신들의 교구민이자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을 지낸 임성무 선생(그는 초등 교사이기도하다)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한 것으로 알려졌고, 지역의 공영방송인 KBS와 MBC는 임 선생이 대구검찰에 출두하는 모습을 시민들에게 전했다. (<대구MBC-천주교 대구대교구 쇄신 의지 있나?>/ <KBS대구-쇄신 요구 평신도 명예훼손고발 논란>) 임 선생으로 인하여 대구대교구의 명예가 훼손당했다고 고발인은 생각한 모양이지만 정작 천주교의 명예를 훼손한 이는 누구인가?

 

사진캡처=대구KBS방송국

고소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마태27.12)

성경 풀이의 전문가들은 다음 대목을 어떻게 읽었을까? 주교회의판 마태오 복음 중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시다>(27.11-14)라는 제목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총독 앞에 서셨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총독이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당신을 고소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저들이 갖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하고 물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고소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총독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예수는 왜 침묵했을까?

신학자는 신학으로 성경을 읽지만 민중은 몸으로 성경을 읽는다. 세상에 가득 찬 소리를 “보고, 듣고, 몸으로 느끼는”(탈출3.7)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한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지 교구라는 체제가 있어서 공동체의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우리 모두인 것이다. 그 말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신도가 하는 말과 생각과 활동이 때로는 교회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표현이 온당키나 한 일일까? 그것은 애당초 언어로서 설립될 수 없는 말이거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짐(朕)이 곧 교회다” 혹은 “짐과 내 신하들만이 교회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이번 명예훼손 사건의 본질일 것이다.

천주교판은 좁다

한자 ‘疏’는 우리말로 ‘소’라고 읽으며 ‘트이다, 통하다’로 뜻을 새긴다. 그 트이고 통하는 안에 있으면 ‘소통’이 되는 것이고, 그 밖으로 내몰면 ‘소외’가 된다. 과연 이번 명예훼손 고발인은 ‘소통’이란 말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실행하고 있을까? 만의 하나 서로가 보는 관점이나 입장이 달랐다면 함께 공동의 화제를 두고 같은 종교인으로서 기도하고, 고민하고, 서로의 말이라도 ‘섞기나’ 한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상종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고얀 놈’으로 주홍글씨를 등 뒤에 새긴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가 된다.

한국천주교회는 군종교구 포함하여 16개 교구다.(북녘 제외) 작년 말 통계로 보면 천주교인이 580여만 명 된다. 많은 숫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닥이 그리 넓지 않다. 안팎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사실 빤하다. 사제단이나 수도자도 그렇고 평신도 사정도 다르지 않다. 지역교구에서는 더욱이 그러하다. 사람 자원이 제일 많다고 하는 서울대교구도 그러하거니와 대구와 광주 역시 그 범주 안에 있다.

 

사진캡처=대구MBC방송국

취하하고 소통하라

그러기에 소통 못 할 일이 무엇인가? 무엇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강 이쪽과 저쪽으로 서로 마주보거나 등을 돌리고 있는가? 누구하나 예외 없이 모두가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모습이 죄이고 부끄러운 일이다. 좁은 이 바닥을 태평양만큼이나 넓게 여기지 말일이다. 정신적으로야 우주 밖을 날고 있을망정 ‘조고각하(照顧脚下)’ 바로 우리네 발밑을 보는 일이 최우선이다. 우리가 몸으로 밀고 사는 지금 여기는 그리 넓지 않다.

그러니 소통하고 또 소통해야 할 우리네 살림살이다. 우리가 종교란에 적는 ‘가톨릭’이나 ‘천주교’라는 말은 교파의 이름이거나 ‘죽임’의 종교가 아니라 ‘살림’의 종교란 말이지 않는가? 평신도 희년에 평신도를 고소하는 일은 코미디도 아니고 ‘썩소’의 대상일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재미가 별로 없는 세상에 또 하나의 팔리지 않는 콘텐츠를 더해주는 정말 재미없는 세상의 한 단면이다. 그러니 고발인은 취하하고 소통하라.

시노드(Synod)도 좋고 쇄신위원회도 좋다

문제의 핵심을 보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이 진면목(眞面目)을 바라보는 일이다. 이웃종교인 불교에서는 그것이 깨달음의 시작이며 마침이라고 할 정도이니 그 중요성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신학적이고 사변적인 것은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흔히 말하는 외인(外人)이거나, 비그리스도인이거나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의 눈높이로 현재의 우리를 쳐다보는 일이 우선이다. 그들이 대다수이며 우린(천주교인)은 겨우 인구의 10%를 차지할 뿐이다.

예수가 세상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 적이 있을까? 오히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중 겉으로는 멀쩡하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같은 사람들에게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루카8.8)고 했다. 그러니 먼저 집단용어나 특수용어가 아니라 세상의 언어로서 신앙을 말하라. 긴 것은 길다고 말하고 짧은 것은 짧다고 말하라.

시노드(Synod)도 좋고 쇄신위원회도 좋다. 하얀 백지 위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넣듯이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려보라. 그것이 보물지도가 되어 세상 모두를 하느님나라로 데려갈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참 재미없는 세상에서 보물지도 한 장 건졌다고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126.5)

* 참고
<대구MBC-천주교 대구대교구 쇄신 의지 있나?>
<KBS대구-쇄신 요구 평신도 명예훼손고발 논란>

 

김유철 스테파노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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