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평범한 성인에게서 영원의 흔적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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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평범한 성인에게서 영원의 흔적을 보다
  • 한상봉
  • 승인 2018.01.02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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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내가 하느님을 보는 눈-4]

평범한 성인들_아기를 재우는 여인

프로방스 지역 아를의 노란 집에 살 때, 한 두 블록 떨어진 거리에 있던 철도교 근처 우편배달부 조세 룰랭의 가족들은 고흐의 가장 좋은 벗이었다. 고흐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조세를 그렸다. 조세는 성격이 화통하고 친절했으며, 교회를 비롯한 제도를 못 견뎌 했다. 고흐가 여동생 빌헬미나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조세는 열정적인 ‘혁명론자’여서 딸아이에게 세례를 주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직접 아이에게 세례를 주겠다면서, 프랑스 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우편배달부 룰랭의 초상화와 그의 아내 오귀스트 룰랭의 초상화 <아기를 재우는 여인>

고흐는 조세의 부인 오귀스트 룰랭을 몇 번이고 그렸다. 고흐는 그녀의 초상화 양쪽에 해바라기 그림을 ‘장식 촛대’처럼 두고 싶다고 말했다. 이 그림이 <아기를 재우는 여인>(1889)이다. 고흐는 평범한 농부와 노동자들을 통해 성인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림을 통해서 나는 음악처럼 위안이 되는 메시지를 주고 싶다. 나는 후광으로 상징되던 것, 우리가 자신의 빛깔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와 떨림으로 전하고자 하는 그런 영원의 흔적을 간직한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

<아기를 재우는 여인>(1889)은 꽃이 그려진 벽지를 배경으로 손에 끈을 붙잡고 있는 오귀스트 룰랭의 초상화다. 이 그림은 마치 꽃과 묵주가 있는 마리아를 연상시켰다. 이 그림은 ‘요람을 흔드는 사람’(La Berceuse)이라는 표지가 있지만, 정작 그림에는 요람이 그려져 있지 않다. 고흐는 그림을 보는 사람이 요람 안에 누워 어머니를 올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렸다. 그녀는 요람을 흔들면서 손에 끈을 들고 있다. 관람자와 요람을 흔드는 사람이 사랑의 보살핌이라는 이 끈을 통해 하나로 묶인다.

밀레의 <별이 빛나는 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무한으로 가는 통로, 별이 빛나는 밤

고흐는 1889년 자진해서 생 레미에 있는 생 폴 드 모솔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1년 넘게 있다가, 1890년 5월 18일 파리에 있던 테오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나흘 뒤에, 파리 북서쪽 오베르에 있는 한 다락방으로 이사했고 7월말에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생 레미에서 그린 <별이 빛나는 밤>(1889)은 고흐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고흐는 밀레의 유화 <별이 빛나는 밤>을 보았을 테고, 그가 가장 존경하던 밀레의 말을 귀담아 들었을 것이다. 밀레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밤의 광채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이 바람의 노랫소리와 침묵의 속삭임을 듣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무한을 느껴야 한다. 수세기에 걸쳐 변함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러한 빛들을 생각하면 놀랍지 않은가? 그 빛은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비추고, 우리 세상이 산산조각날 때에도 고마운 태양은 아무 감정 없이 세상의 절망을 묵묵히 지켜볼 것이다.”

밀레 다음으로 고흐에게 영향을 준 이는 월트 휘트먼이다. 1888년 고흐는 여동생 빌헬미나에게 이런 편지를 썼었다.

“미국 시인 휘트먼의 시를 읽어보았니? 그는 미래에서, 아니 현재에서도, 건강하고 인간적이며 강렬하고 솔직한 사랑과 우정, 노동이 존재하는 이 세상 위로 펼쳐진 별빛 비치는 커다란 둥근 하늘을 본다. 그것은 결국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며, 이 세상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영원이다.”

고흐는 지상의 평범한 사물들 안에서 육화된 진리를 추구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다가 어려움이 닥쳐올 때면, 무한의 상징들이 가득 찬 밤하늘을 더욱 대담하게, 더욱 직접적으로 찬미했다. 그에게 별은 무한으로 가는 통로였다.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은 이런 상상력을 끝까지 펼쳐 창조한 가장 ‘음악적인’ 작품이다. 그의 작품들에선 일상의 땅과 무한한 하늘이 서로를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

가정의 거룩한 성사_첫 걸음마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고흐는 밀레의 <첫 걸음마>라는 소묘를 유화로 베껴 그렸다. <첫 걸음마>(1890년 2월). 푸른 옷을 입고 금발머리를 핀으로 틀어 올린 농부의 아내는 몸을 숙여 돌이 갓 지난 아이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어린 아이는 아빠를 향해 팔을 뻗고 있고, 농부는 정원에 왼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아이를 향해 팔을 활짝 벌리고 있다. 이 그림은 모든 가정에서 경험하는 거룩한 성사와 같은 이 순간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고흐는 생 레미 요양원에서 지낸 생애 마지막 해에 다시 모사작업을 했다. 그 가운데는 렘브란트의 작품 2점, 들라크로와의 작품 3점, 그리고 밀레의 작품은 무려 20점이나 된다. 고흐는 아픈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창작 대신에 이 작업을 한다고 했다. 고흐는 소묘로 남겨진 밀레의 그림에 ‘색깔’을 입히면서, 혹시 표절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평소 존경하던 화가들의 작품을 그리면서 큰 기쁨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고흐는 위대한 작곡가의 힘을 빌어 변주곡을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흐는 ‘농부화가’인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에게 깊고 친밀한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1874년 미술상 점원 시절에 쓴 편지에는 <만종>을 아름다운 ‘시’라고 표현했다. 파리에서 밀레의 소묘와 파스텔 작품 전시회에 갔을 때 마치 누군가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밀레는 고흐에게 ‘이상’이었고, 영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고흐는 밀레의 이 말을 늘 마음에 담아 두었다. “나는 결코 고통 없이 지내지 않을 것이다. 고통은 예술가들 자신을 가장 정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상시에가 지은 책 <장 프랑수아 밀레의 생애와 작품>을 발견했을 때 고흐는 무척 기뻐했다. 이 책 원본에는 농부들이 신는 ‘나막신’ 한 켤레의 스케치가 새겨져 있었다. 밀레는 친구들이 기념할만한 것을 요구하면 여자들에게는 카드에 밀을 몇 줄기 그려주고, 남자들에게는 나막신 한 켤레를 그려주곤 했다고 한다. 고흐는 밀레에게서 자연과 일하는 농부들의 꾸밈없고 정직한 시선을 배웠다.

 

밀레의 <첫걸음마>

 

고흐의 <첫걸음마>

고흐는 <첫 걸음마>를 그리면서도 크리스틴과 잃어버린 가족을 생각했을 것이다. 첫 걸음마는, 하느님의 신비로 나아가는 사랑의 보살핌 안에 남자와 여자와 아이를 하나로 묶어주는 가정생활의 한 순간이다. 고흐는 오랫동안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느님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친구든 아내든 무엇이든, 네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모두 사랑해라. 그러면 하느님을 점점 더 잘 알아가게 된다.”

고흐는 자신의 믿음을 늘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어느 네덜란드 화가가 고흐에게 삶의 신조가 무엇인지 물은 적이 있다. 이때 고흐는 이렇게 답했다.

“침묵하고 싶지만 꼭 말을 해야 한다면 이런 걸세.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산다는 것. 곧 생명을 주고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보존하는 것. 불꽃처럼 일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선하게, 쓸모있게,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것. 예컨대 불을 피우거나, 아이에게 빵 한 조각과 버터를 주거나, 고통 받는 사람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는 것이라네.”(라파르에게 보낸 편지)
 

[참고] <하느님의 구두 (The Shoes of Gogh)>, 클리프 에드워즈, 솔, 2007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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