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거룩한 구두 한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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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거룩한 구두 한켤레"
  • 한상봉
  • 승인 2017.12.2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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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내가 하느님을 보는 눈-3]
<낡은 구두 한 켤레>(1886)

부재의 현존-낡은 구두 한 켤레

구두끈이 뻣뻣하게 꼬여있는 가죽 구두 한 켤레. 주름이 잡혀 있고 진흙이 묻어 있어 있다. 황금색과 흰색이 신비스럽게 섞인 배경은 마치 후광처럼 신발을 부각시키고, 왼쪽으로 떨어지는 그림자만이 바닥의 느낌을 살려준다. <낡은 구두 한 켤레>(1886)이다. 이 그림을 보고 독일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낡은 신발 안쪽으로 드러난 어두운 틈새로 주인의 고생스러운 걸음걸음이 뚜렷하게 보인다. 딱딱하게 주름진 신발의 무게 안에는 스산한 바람이 휩쓰는 넓게 펼쳐진 들판에 균일하게 파인 고랑들 사이로 터벅터벅 천천히 한 걸음씩을 옮겨놓았을 그녀의 발걸음들이 쌓여 있다. 구두 가죽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이 스며 있고, 구두창 아래에는 해가 떨어질 무렵 밭길을 걸어가는 외로움이 펼쳐져 있다. 이 신발에는 대지의 소리 없는 외침이 진동하고 있다.”

토마스 카알라일은 <의상철학 Sartor Resartus>에서 우리가 입는 옷을 “육신의 껍질”이라고 했다. 고흐는 그 인간 껍질 가운데 가장 낮은 부분에 있는 ‘신발’을 선택했다. 이 구두는 “이 신발을 남기고 간 노동자의 혼을 대변하며, 우리에게도 이 신발을 신어보고 그의 삶을 체험해보도록 초대한다.”고 클리프 에드워즈는 말한다.

고흐는 성탄절마다 디킨슨의 작품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었다고 한다. 죽음의 순간으로 미리 가 본 스쿠루지는 자기 무덤의 비석을 보고 자신의 부재를 경험하면서 탐욕에서 해방된다. 고흐는 디킨스가 죽었을 때 디킨스의 텅빈 의자를 그렸고, 고갱이 아를을 떠나겠다고 협박할 때 고갱의 빈 의자를 그렸다. 고흐의 마지막 작품인 폭풍우 치는 하늘 아래 까마귀를 그린 밀밭에도 길은 뻗어있지만 인적은 없다. 이를 두고 클리프 에드워즈는 ‘부재의 현존’이라 불렀다.

고흐가 그린 구두에 구두의 주인이 없음으로써, 우리는 초라한 구두 한 켤레가 던져주는 ‘신비로운 암호’를 풀어보라고 초대받고 있다. 보는 이의 상상 속에서 그 노동자나 농민의 부재와 죽음, 고독과 그 사람의 현존은 더 짙게 드러난다. 앙투안 생텍쥐페리는 “모든 것은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마침내 완성된다”고 했다. 덩그런히 놓여있는 모든 것을 생략하고 덜렁 구두 한 켤레만 그렸다.

 

<빈센트의 침실>(1888)

프로방스 지역 아를의 노란 집에서_꽃이 만발한 배나무와 나비

고흐가 드렌테와 누에넨 그리고 파리에서도 길고 추운 겨울을 보냈다. 파리에서 고흐는 인상파 화가들이 보여준 밝은 색채를 실험했다. 이때 고흐는 색감이 화려한 일본 그림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중 일부를 유화로 그리기도 했다. 급기야 고흐는 ‘일본만큼 아름다운’ 시골을 찾기 위해 1888년 2월 20일 파리를 떠나 지중해에서 멀지 않은 론 강가에 위치한 로마시대의 엣 도읍인 프랑스 남부 아를로 옮겼다. 처음 그림을 시작한 1880년 고흐는 “내 영혼 안에는 거대한 불길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무도 그 불을 쬐러 오지는 않아”라고 테오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실제 고흐는 파리에서도 몸과 마음이 병들어 거의 알코올 중독상태였다고 한다. 그해 봄이 오면서 고흐는 꽃이 만발한 과수원을 보고 “일본에 와 있는 것 같다”고 테오에게 편지를 보냈다.

파리에서 사귀었던 작가들과도 떨어져 고독 속에서 오히려 자연을 발견한 고흐는 꽃나무와 싹이 움트는 밀, 해바라기들을 벗 삼아 그 속에서 희망과 영감을 얻었다. 그는 그곳에서 어설프게 생긴 배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꼭 자기처럼 아직 얼어붙고 볼품없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활력과 희망으로 꽃을 피울 수 있는 불길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흐는 아를에서 열정적으로 작품에 몰두했다. 444일 동안 200점의 유화와 100점이 넘는 소묘와 수채화를 완성했다. 여기서 그는 소박한 <빈센트의 침실>(1888)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 푸른색 작업복과 모자가 못에 걸려 있지만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고흐가 처음에 머물던 곳은 카렐 호텔이었다. 그러나 곧 방이 네 개 딸린 노란 집으로 이사했다.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불을 켜거나 음식을 요리할 가스가 들어오지 않는 집이었으만 당연히 집세는 쌌다.

고흐는 이 집을 ‘예술가들의 집’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이라는 고흐의 이상은 이제 가난한 화가들에게 향했다. 여기서 화가들이 수도승처럼 단순하게 살아가며 작업하는 안식처를 마련하고자 했다. 당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고갱을 초대한 것도 그 이유에서다. 그러나 고갱은 고흐의 동생 테오를 통해 자신의 그림을 팔아볼 마음으로 호의를 받아들여 아를에 왔으나, 두 달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이 시기가 고흐에게 최초의 간질 발작이 일어났으며,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이 일어난 때였다.

화가공동체의 꿈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고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게다가 홍수로 그 집이 파손되었다. 그 집과 함께 그의 꿈도 죽었으나 회복력은 다른 데서 찾아왔다. 고흐의 다음 침실은 생 레미 요양원의 창살 있는 병실이었다. 거기서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을 비롯해 씨뿌리는 사람들과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는 밀밭 그림 연작들, 올리브 과수원과 편백나무, 꽃이 만발한 아몬드 나무를 그렸다. 그리고 그의 생애 마지막 침실은 오베르에 있던 창문이 없는 무더운 다락방이었다. 그는 거기서 70일을 지내면서 70점의 작품을 더 그린다. 그 가운데 오베르 성당, 폭풍우 치는 하늘아래 밀밭, 가세박사의 초상화 등이 있다.

 

[참고] <하느님의 구두 (The Shoes of Gogh)>, 클리프 에드워즈, 솔, 2007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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