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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머리에는 태양을 가슴에는 폭풍우를 품고[빈센트 반 고흐, 내가 하느님을 보는 눈-마지막회]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

장엄한, 까마귀가 나는 밀밭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년 7월)은 수확을 앞둔 밀밭이 폭풍우 치는 하늘에서 불어오는 보이지 않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있다. 세 갈래 길이 나 있는 밀밭 위로 40여 마리의 검은 까마귀들이 날아다닌다. 텅 빈 길은 우리를 부르고, 밀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꿈틀대며, 새들은 모두 같은 날갯짓으로 밀밭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다.

고흐는 본래 폭풍우를 좋아했다. 광산촌 보리나주에서 고흐가 잠시 머물던 빵집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아주 무더웠던 어느 날, 갑자기 격렬한 폭풍우가 몰아쳤지요. 그 친구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바깥 들판에 나가 서서는 하느님의 위대한 경이로움을 바라보았어요. 그리고는 아주 흠뻑 젖어서 돌아왔어요.” 헤이그에서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폭풍우가 격렬하게 몰아치는 동안 큰 나무 아래에서 서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잠잠해지고 까마귀들이 다시 날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잠시 기다려야 했던 것이 아깝지 않았다. 비 때문에 아주 깊은 색감을 띠게 된 땅이 아름다웠거든.” 폭풍우는 하느님의 장엄한 작품을 보여주었고, 그를 차분하게 만들면서도 흥분되게 만들었다.

고흐는 동료화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들라크루아를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고귀한 화가 들라크루아는 미소를 띤 듯한 표정으로 죽었다. 그는 머리에는 태양을, 가슴에는 폭풍우를 품고 살았다. 그는 전사에서 성인으로, 성인에서 연인으로, 연인에서 호랑이로, 호랑이에서 꽃으로 옮겨갔다.” 이 글을 두고 클리프 에드워즈는 “고흐는 머리에는 태양을, 가슴에는 폭풍우를 품고 살았다. 그는 광부들과 농부들을 그렸고, 여염집 아낙네와 엉겅퀴에서 성인을 발견했고, 마지막에는 밀밭과 까마귀와 폭풍우 치는 하늘로 옮겨갔다.”

 

안도 히로시게(歌川広重, Ando Hiroshige)의 그림

고흐에게는 까마귀조차 ‘사악하고 불길한’ 상징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 판화를 좋아했는데, 특히 안도 히로시게(歌川広重, Ando Hiroshige, 1797-1858)의 습작에서 보는 것처럼, 선불교 예술가들은 우아한 왜가리나 황새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발견하지만 까마귀의 아름다움은 안목 있는 사람만이 알아볼 수 생각했다. 또한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에도 까마귀가 하늘에서 내려앉고 있는데, 밀레는 “나무들과 숲속의 둥근 돌들, 땅 위로 갑자기 날아 닥치는 까마귀들이 주는 소박한 기쁨을 나는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까마귀 떼 사이로 걷는 사람의 엄숙한 분위기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또한 주인 없는 구두와 침실처럼, 고흐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서 부재가 주는 신비감을 더해 준다. 그 밀밭과 길 사이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갈색 땅 가운데 움푹 파인 부분은 오랜 세월에 걸쳐 난 발자국과 밭으로 몰고 다녔던 수레의 무게를 보여준다. 이 그림에선 땅과 인간노동과 날개 달린 피조물들과 하늘이 만나는 낙원을 보여준다. 고흐는 ‘자연이라는 위대한 책’에 표현되어 있는 치유의 말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는 정식 교육도 받지 못했고, 모댈을 구할 돈도 없었고, 미술상인의 관심도 받지 못했고, 작업실과 화가공동체를 만들려던 시도도 실패했다. 그러나 이 덕분에 그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고독 속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림을 배우지 못했던 것이 다행스럽다. ... 그러나 나는 내 그림에서 언젠가 내 마음을 치고 지나갔던 울림을 발견한다. 자연이 나에게 무언가 말해왔고, 말을 걸어왔으며, 나는 그것을 재빨리 받아 적어 화폭에 옮겨 놓았음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그렇게 받아 적은 것 가운데 해독할 수 없는 말들도 있고 오타나 누락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숲이나 바닷가나 사람들이 나에게 말한 것을 조금은 그 안에 담고 있으며, 그것은 학습이나 체계에서 이끌어낸 따분하고 진부한 언어가 아닌 자연 그 자체에서 온 언어였다.”

 

고흐 <착한 사마리아인>

여자처럼, 섬세한 사랑으로 살아 계시는 하느님

오베르에서 보낸 마지막 70일 동안 고흐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끈질긴 경청과 말없는 세심함, 양육과 같은 여성적 감성으로 작품에 몰두했다. 고흐는 자신이 존경과 사랑을 바쳤던 작가들을 편지에 언급하면서, 그들의 ‘아름다운 차분함’을 이렇게 전했다.

“그들은 여자들처럼 주의 깊고, 섬세하며, 지적이고, 자신의 고통에 민감함은 물론 생명력과 자기인식이 충만하다. 무관심한 냉철함은 보이지 않고. 생명을 경시하지도 않은 그들은 세상을 떠날 때에도 여자들과 같은 모습이다. 하느님에 대한 틀에 박힌 생각이나 추상적인 것을 피하고, 언제나 삶 자체에 탄탄하게 발붙이고 거기에만 신경을 썼다. 가시 말하자면, 그들은 사랑이 충만했고, 삶에 상처 받았던 여자들처럼 죽는다. 실베스트로와 들라크루아에 대해 말했듯이, 그들은 미소 띤 따뜻한 얼굴로 죽는 것이다.”

고흐에게 하느님이란 이런 분이다.

“내게 있어서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박제된 죽은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계시면서 우리에게 다시 사랑하라고 뿌리칠 수 없는 권유를 하는 하느님이 계시다. 이것이 내 생각이다.”

고흐에게 ‘하느님’은 현존하는 사랑의 신비를 가리켜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다. 이 ‘하느님’과 ‘사랑’은 종교나 예술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삶 자체의 단순함, 생명을 싹틔우는 가정과 밀밭의 힘 안에 존재한다고 고흐는 믿었다.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

아울러 고흐는 프로방스에서 계절의 주기에 따라 자연과 하나 되는 ‘땅의 복음’을 체득했다. 그는 밀과 인간이 같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이나 밀이나 똑같다는 것을 강하게 느낀다. 땅에 뿌려서 싹을 틔우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니? 그리고 결국에는 맷돌에 갈려 빵이 되지. 행복과 불행의 차이! 이 둘 다 필요하고 유익하다. 죽음 또한 사라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자연 전체와 어울릴 때, 우리는 죽음의 순간 혼자가 아니라 계절의 변화라는 위대한 기적의 일부가 된다고 고흐는 믿었다. 그래서 수확하는 밀을 보면서, “이런 죽음에는 슬픔이 없다”고 했다. “태양이 만물을 순수한 황금빛으로 적시고 있는 환한 대낮에 찾아오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고흐의 묘.

내가 하느님을 보는 눈, 하느님이 나를 보는 눈

빈센트 반 고흐는 1890년 7월 29일, 서른일곱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꼭 10년 동안 그림을 그렸다. 유일한 후원자 테오는 그로부터 여섯 달 후, 서른 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독일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고흐의 화집을 보고서 “성 프란치스코와 비슷한 정신이 다시 살아 숨 쉬고 있는” 화가의 “지칠 줄 모르는,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감탄했다. 고흐는 “밤이든 낮이든 아주 극심한 고통을 겪고” 살았지만, 그의 그림 <꽃이 만발한 나무>처럼 “그의 가난은 이미 풍요로움이 되었고, 내면에서 퍼져 나오는 찬란한 빛이다. 그게 바로 그가 가난한 사람으로서 세상을 바라본 방식”이라고 했다. 그것은 “이름 없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라고 릴케는 말했다.

1300년대 도미니코회 출신 독일 신비가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내가 하느님을 보는 바로 그 눈이 하느님께서 나를 보시는 눈이다”라고 말했다. 화가의 눈은 피조물을 볼뿐 아니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주의 활동도 본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 안에 자신의 영혼을 열어놓는다. 그때에 하느님 역시 그 그림을 통해 그의 내적 삶에 빛을 비추어주신다.

우리는 그림을 볼 때, 화가가 보았던 계시의 순간에 함께 하도록 초대받는다. 클리프 에드워즈는 어떤 장면을 보고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숨죽여 서 있는 화가를 볼 때, 그의 모습은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려고 서 있는 모세와 같다고 했다. 모세는 떨기나무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은 떨기나무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고흐의 그림이라는 ‘창문’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창문은 이중의 기적이다. 창문은 바깥을 내다볼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내부 공간을 밝혀줄 빛을 들여오기도 한다.”

 

고흐와 테오 동상

고흐는 오베르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한 작은 묘지에 테오와 함께 묻혀 있다. 이 형제의 돌비석에는 “빈센트 반 고흐, 여기 잠들다. 1853-1890”, “테오도르 반 고흐, 여기 잠들다. 1857-1891”라고만 적혀 있다. 그들이 세상에 선물한 그림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없다.

준데르트의 네덜란드 개혁교회 근처에는 고흐와 테오의 동상이 있다. 그 바닥에는 고흐가 죽은 다음 테오가 형의 주머니에서 발견한 편지에서 따온 말이 적혀 있다.

“너는 나를 통해서 큰 불행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그림을 실제로 만드는 일에 동참해 왔구나.”

[참고] <하느님의 구두 (The Shoes of Gogh)>, 클리프 에드워즈, 솔, 2007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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