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 같은 이에게도 의로운 분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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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 같은 이에게도 의로운 분노가 있다
  • 한상봉
  • 승인 2017.01.10 1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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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독실한’ 신자란 무엇일까? 새벽 찬 바람에 아랑곳없이 새벽미사를 거르지 않는 부지런한 신심인가? 항시 묵주를 손에 놓지 않는 성실함일까? 개신교인처럼, 성경을 늘 가방에 넣고 다니는 사람일까? 그게 무겁다면, 매일미사 책이라도 전철에서 꼼꼼히 읽고 밑줄 치는 분일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착한’ 사람일까? 본당에서 보통 강조하는 신실한 신자는 착한 그리스도인이다. 틈나는 대로 도울 일을 찾아 나서고, 험한 욕 안 하고 사는 사람이다. 남에게 해코지 안 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다. 매사에 잔잔한 따뜻함이 묻어나는 사람이다. 시인 신석정도 그런 사람이었다. 서정시 같은 사람이었다.

신석정은 전북 부안 선은리에 살았다. 낮에는 논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촛불을 켜 놓고 시를 쓰는 시인의 초가집 마당에는 시누대, 은행나무, 벽오동, 목력, 철쭉 등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가까이 내소사가 있고, 서해바다가 보이는 시골집이 그이의 삶의 자리였다.

신석정은 <작은 짐승>이라는 시에서, “란이와 나는/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고 했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이윽고 시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란이와 나는/역시 느티나무 아래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고.

<시인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신경림은 신석정이 “고향이 갯비린내 나는 바닷가이지만, 항상 바다보다 산을 더 좋아했다”는 어느 평론가의 이야기를 전했다.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더니 신석정이 그런 사람인 듯싶다. 1967년 궁핍했던 시절에 2천원이나 되는 고가의 크라운판 시집을 내면서 시인은 제목을 <산산산(山山山)>이라 지었다. 그 시가 이렇다.

지구엔
돋아난
산이 아름다웁다

산은 한사코 높아서 아름다웁다

산에는 아무 죄없는 짐승과
에레나보다 어여쁜 꽃들이
모여서 살기에 더 아름다웁다

언제나
나도 산이 되어보나 하고
기린같이 목을 길게 늘이고 서서
멀리 바라보는


어떤 이가 사람을 식물성 인간과 동물성 인간으로 구분해 놓은 글을 예전에 어디선가 읽어본 적이 있다. 동물은 항시 먹을 것을 찾아 배회하는데, 식물은 태어난 자리를 탓하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신석정 역시 바람결에 끝없이 쓸리면서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를 좋아한다. 그리고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고 권한다.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 되자고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처럼, 저 살자고 남한테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원수조차 사랑하자는 말을 곰곰이 새기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착한 사람이다.

그러나 선한 눈매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이따금 불의 앞에서 의로운 분노를 보이는 사람 역시 그리스도인이다. 사실상 강자 앞에서 강하고, 약자 앞에서 여린 사람이다. 먼저 예수님을 보라. 율법조항을 꼬치꼬치 따지며 남을 죄인으로 만드는 바리사이들이나, 완장 차고 세도를 부리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을 그리도 모질게 비판하셨지만, 아이들이며 여인들과 죄인들을 자상하게 받아주셨다. 심지어 혁명당원들과 창녀와 세리마저 친구로 삼으셨다. 급기야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사제들을 힐난하고 장사치들의 좌판을 뒤엎으셨다. 2014년에 방한하셨던 프란치스코 교종이 “형제들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석정 시인

이승만 독재를 경험한 김수영 시인은 1960년 4월 26일 이른 아침에 시를 쓰면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고 적었다. 그러자 여기에 화답하듯이, 신석정은 “한 시인이 있어/<닥터 李>의 초상화로 밑씻개를 하라 외쳤다하여/그렇게 자랑일 순 없다./어찌 그 치사한 휴지가 우리들의 성한/육체에까지 범(犯)하는 것을 참고 견디겠느냐”고 했다. 이 짧은 시의 제목은 <쥐구멍에도 햇빛을 보내는 민주주의의 노래>이다. 이승만의 사진을 밑씻개로 삼아서 내 몸을 더럽힐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접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환멸도 이와 같다. 부정한 권력과 그 부역자들의 얼굴은 추하다. 온갖 미용시술을 받은 얼굴이지만 역겨움이 욕처럼 올라온다. 그네들 얼굴이 박힌 신문지 역시 밑씻개로도 쓰고 싶지 않다. 서정시를 욕설로 만드는 세상에서, 착한 신자는 정의로운 분노를 배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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