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 예수와 금수저 박근혜 "뒤바뀐 첫째와 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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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 예수와 금수저 박근혜 "뒤바뀐 첫째와 꼴찌"
  • 한상봉
  • 승인 2016.12.26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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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예전에 ‘노숙인다시서기’ 활동을 하던 어느 성공회 신부가 한 말이 새록 새삼 떠오른다. 한 노숙인 여성이 ‘더러운’ 공중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단다. 빈부귀천을 떠나 세상의 모든 아기들은 하느님 은총 안에서 지상으로 초대받은 손님이라는데, 과연 이 아기에게도 축복이었을까? 아기를 낳은 노숙인 산모에게도 그날이 기쁜 날이었을까? “나는 자신할 수 없다”고 이 사제는 고백했다.

성탄절, 많은 이들은 “기쁘다, 구세주 오셨네”라고 예수아기의 탄생을 축하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외양간의 냄새와 함께 이 세상에 침입했다”고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는 적었다. 그분의 양친은 산모의 몸을 풀 방 한 칸 구하기 어려웠다. 아기가 누워있던 곳은 짐승의 밥통이었다. 이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은 목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유대에서 가장 천대받던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더러운 짐승의 똥을 만져야 하고, 밤새 남의 양을 치던 이들은 한밤중 마을에 도둑이 들면 목자들이 제일 먼저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권력의 폭력에 시달렸다. 헤로데가 그의 탄생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서 병사들을 시켜 죽이려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그의 부모는 이집트로 도망가서 ‘이주노동자’ 가족으로 객지에서 살아야 했다. 평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던 예수님이 공생활 벽두에 나자렛 회당에서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선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축복했던 예수님은 유대 지배층과 로마권력의 공모에 의해 십자가에서 살해되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의 운명을 제 운명으로 받아들이셨는데, 아빠 하느님이 그분을 사흘 만에 부활시킨 것처럼, 가난한 이들도 마침내 해방되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게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사진=한상봉

아비와 스승과 친구를 잘못 만난 그녀

예수님은 누추하게 태어났으나 나중에는 ‘그리스도’ ‘왕’으로 대접받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어느 여인은 청와대에서 근사하고 은혜롭게 성장해서 결국 ‘왕 노릇’까지 했으나 결국 ‘파렴치범’으로 낙인찍혔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복음서의 말씀이 예사롭지 않다.

이 어리석은 여인은 아비와 스승과 친구를 잘못 만났다. 예수님의 아빠(abba)는 히브리 노예들의 하느님이었다.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신음소리를 듣고 그들을 해방시킨 하느님이다. 그러니, 그분의 아들인 예수님 역시 로마의 식민지 유대의 노동자 집안에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이들과 뿌리 깊은 연대감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가엾은 여인은 독재자의 딸이었고 공주처럼 자랐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변호인이었고, 그 가운데 마지막 예언자라고 불리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스승이었다. 요한은 권력에 빌붙어 있는 탐욕스런 인사들을 가혹하게 비판하였고, 결국 당대 최고 권력자에 의해 살해당했다. 예수님의 친구들은 어부이며 세리이며 창녀들이었다. 제 힘으로 정직하게 일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고,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주변으로 밀려난 인생들이었다. 하느님 아버지는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고, 그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노예들과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쏟아져 내렸다고 복음서는 증언한다.

그런데 가련한 여인의 스승은 탐욕스럽고 음험한 술사(術士)와 그의 딸이었으며, 그 친구들은 권력을 탐하는 유신헌법의 옹호자이며, 비열한 율법학자들이었다. 최태민, 최순실, 김기춘, 우병우는 어리석은 여인과 공모하여 한 나라를 ‘저들만의 천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공화국의 주권을 농락하고, 아이들의 손에서 밥그릇을 빼앗았다. 예수님은 죽는 순간까지 단 벌 옷마저 세상에 내어주고 벌거벗은 채 돌아가셨다. 그런데 대통령과 최순실의 아해들은 재벌들과 동무하고, 가난한 이들을 빈손으로 보냈다. 슬퍼하는 자들을 더욱 슬프게 하고, 아파하는 이들을 더욱 아프게 했다.

by Christian Ryan

예수는 대낮에 성전에서 가르쳤으나, 그녀는 밤중에 모의하고...

예수님은 몰려든 청중들이 때가 되어 끼니를 걱정하게 되자, “마을로 보내서 먹고 오라고 하자”는 제자들의 제안에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했다. 눈이 동그래진 제자들 앞에 먼저 빵과 물고기를 내어놓은 이는 소년이었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들을 염려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그 가련한 여인은 부모가 갑작스럽게 비명횡사를 하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었지만, 정작 세월호 참사 당일 갑작스레 자녀를 잃게 된 유족들이 통곡하는 순간에도, ‘정상적으로’ 밥 때를 놓치지 않고 ‘혼자서’ 식사를 했다. 책임자 입장에서 산발을 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그 긴박한 순간에도 ‘올림머리’를 손질했다. 자신이 겪은 아픔과 타인의 아픔을 동일시할 수 없는 ‘공감 없음’이 낳은 비극이다.

예수님은 대사제의 저택에서, 최고의회에서,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아무런 변론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비밀리에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네가 메시아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내가 그렇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고, 내가 물어보아도 너희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미 그분을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변론을 통해 굳이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이 떳떳한 만큼 대낮에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한밤중에 은밀히 체포되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대통령과 가련한 최씨 일파는 양심이 그들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에 알아서 대포폰을 사용하고, 남들 쉬는 주일에 작당하고, 밤중에 모의했다. 대낮에 끌려와선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거나 입을 아예 닫아 걸었다. 대통령은 검찰수사를 거부하고, 검찰 출신의 민정수석은 숨어다녔다. 

가장 위대한 바닥사람, 예수

위대한 종교를 창시한 어느 성현들도 예수님만큼 바닥출신은 없었다. 붓다는 왕족이었으며, 공자는 선비가문이었고, 모하메드는 부유한 상인 출신이다. 예수님만이 가난한 노동자의 집안에서, 나자렛의 보잘 것 없는 엄마의 그늘에서 자랐다. 게다가 식민지 백성이었다. 이중삼중으로 고난 받는 땅에서, 적빈(赤貧)의 처지로 살며, 생애의 마지막 몇 년은 집도 절도 없이 떠돌며 만인이 만인에게 형제인 ‘하느님 나라’만을 꿈꾸었다. 이 나라에선 “섬기는 자가 다스린다.”

가장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 사랑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데서 드러난다고 말했다. 이런 사랑과 정의가 온갖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다고 여기신 분이 예수님이다.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가 호흡처럼 자연스러운 나라가 하느님 나라이다. 그래서 남는 말은 이것이다. “흙수저는 복되다. 하느님 나라가 그대의 것이니.”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기사출처/의정부교구 2016년 12월 25일자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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