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팬클럽 회원인가요? 예수 제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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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팬클럽 회원인가요? 예수 제자인가요?
  • 한상봉
  • 승인 2017.01.01 2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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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요즘 유시민의 <공감필법>(창비, 2016)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여기에 ‘떡신자’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밀가루 신자는 들어봤어도 ‘떡신자’는 처음입니다. 알고보니 신영복 선생의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책에서 인용한 이야기더군요. 떡신자란 교도소에서 위문품이 있는 모든 종교집회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기천불 종합 신자라고도 하는데, 화요일 기독교 예배, 수요일 천주교 미사, 목요일 불교 예불에 모두 참석하는 재소자겠지요. 종교집회에 가면 빵이나 떡 봉지를 나누어주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선생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답니다.

눈치 빠른 '떡신자' 이야기

종교집회 참석은 통상 신자명단에 들어있는 사람들에게만 허용하는데, 신영복 선생은 “나는 무기수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종교를 하나 가질 생각이어서 여러 종교집회에 부지런히 참석하려고 한다”고 말하며 관문을 통과했다 하더군요. 그 교도소에는 떡신자 라이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창신동에서 자랐다해서 ‘창신꼬마’로 불리던 이였습니다.

눈치가 워낙 빠른 창신꼬마는 예배에 참석하면 단박에 강당 무대 옆에 놓인 박스를 기웃거립니다. 참석한 인원에 비해 빵이 부족할 듯하면 줄 앞쪽에 서서 먼저 받고, 빵이 남을 듯하면 뒤로 처져서 나중에 빵을 받아야 하니까요. 빵이 남으면 보통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에게 두 개씩 더 주곤 했으니까요. 교도소에서도 정보에 민감하고 눈치가 빨라야 이문을 챙깁니다.

이 글을 읽고 유시민은 논산훈련소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훈련병들이 행군을 하다가 밥 때가 되면 줄지어 배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배식을 서툴게 하면 밥이 모자라거나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배식담당이 소심한 사람인지 덜렁거리는 사람인지 먼저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주걱 쥔 당번이 소심한 친구라면 뒷줄에 서야 합니다. 처음에 밥을 조금씩 퍼주다가 남겠다 싶으면 막판에 많이 주거든요. 덜렁대거나 대범한 당번이면 앞줄에 서야 합니다. 처음엔 막 퍼주다가 나중에야 모자란다는 걸 알게 되거든요.

복음서를 교과서처럼... "신앙생활도 눈치가 빨라야  한다"

신앙생활도 정보와 눈치가 빨라야 필요한 걸 제대로 얻어먹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종교이니,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희망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라시는 걸 알려면, ‘복음서’를 교과서처럼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 그분에 대한 일차적 정보가 가장 많이 담겨 있으니까요? 신학자들이나 신부님들이 뭐라 하면 그 속내가 뭘지 가늠하는 눈치도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공평과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우리 삶을 심판하실 때에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고, 병든 이들을 위로하고, 갇힌 자들을 찾아가 주었는지 묻는다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정의평화와 공동선에 전혀 관심이 없고, 주변의 가난한 이들을 전혀 돌보지 않으면서 성당에만 열심히 나가서 꼬박꼬박 미사봉헌하고 교무금 낸다고 구원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헛다리를 짚은 것입니다.

미사참례와 기도와 봉헌은 신앙생활의 필수조건이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른바 구원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전례와 기도생활뿐 아니라 세상의 아픈 이들과 동반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 신자들이 교회에서 예수님을 알아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성사’가 되는 데 있습니다. 교회의 존립목적은 교회유지가 아닙니다. 세상 속에 먹이로 자신을 내어주는 게 교회이며,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오죽하면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나는 성전에 안에 머무는 안온한 교회보다 거리로 나가서 더럽혀지고 멍들고 상처입은 교회를 더 좋아한다”고 하셨을까요.

나와 내 가족만 돌보는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닙니다. 신자들 가운데 묵주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어떻습니까? 대부분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한 것이지, 이 세상의 평화와 가련한 이웃들의 행복을 청하는 기도는 거의 없다고 봐야죠. 그래서야 원하던 구원을 얻을 수 없지요. 잘못된 정보와 주관적인 욕심 때문에 신앙생활을 그르치는 것이지요.

나는 예수의 팬인가, 제자인가?

카일 아이들먼은 <not a fan.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여기서 아이들먼은 안전한 관중석에 앉아서 축구선수를 응원하는 팬은 많지만, 직접 제가 좋아하는 선수처럼 운동장에 내려가 숨가쁘게 공을 차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걱정합니다. 그 선수의 전적과 고향과 가족사항, 생년월일까지 꿰고 있지만 정작 그 사람의 인간적 고뇌와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습니다. 다만 내 욕망에 부응할 때까지만 그 선수는 나의 우상으로 남습니다.

우리가 ‘가톨릭신자’라고 말할 때,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에 대해 내가 “믿습니다”를 반복한다고 신앙인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다짐하고, 그분처럼 따라 사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네 번 정도 하셨지만,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자그마치 스무 번 정도 하셨습니다. 그런 문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게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죽하면 “좁은 문”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겠습니까?

“죄를 용서받고 새 출발 하려면 성당에 나오세요.” “불타는 지옥 가지 않고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성당에 나오세요.” 심지어 “건강과 부를 얻으려면 성당에 나오세요.” 이런 이야기만 하는 선교사가 있다면, 이 사람은 한밤의 쇼핑호스트에 불과합니다. 쇼핑 호스트는 상품의 장점만 말하지 단점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매출이 떨어질 테니까요.

보세요. 예수님을 따른다면 예수님의 부활만 아니라 십자가도 짊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겪어야 할 고난은 그냥 사순절에 ‘십자가의 길’ 몇 번 하는 걸로 면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신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관심을 갖고,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고 평화를 위해 헌신한다면 삶이 고단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그분을 사랑한 나머지 기쁘게 봉사하고 즐겁게 자신을 희생한다면 그게 참된 신앙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옳은 일을 하다가 반역죄로 몰려 죽임을 당한 그분처럼 죄 없이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기자영. 사진=한상봉


수고는 마다하고 과실만 얻으려는 신자들이 많다면, 우리 교회 안에 예수님의 팬클럽은 번창하겠지만, 제자들은 별로 없는 겁니다. 이게 우리 신앙살이의 현주소이고, 교회의 슬픔입니다. 이참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자영 레오나, 9년 동안 암투병을 하면서 전라도 진도에 ‘자연의 집’이라는 흙집을 짓고 오히려 성한 이를 다독거려 주었던 친구였지요. 2009년에 전이된 종양 때문에 한쪽 골반을 떼어내고도 “덕분에 많은 것을 놓게 되었다”며 “가슴 깊은 곳에서 그분은 새로운 꿈을 주고 계신다”고 말했어요.

고통 속에서도 춤추는 나무처럼 

그녀는 자신이 아프면서도, 그 아픔이 지구 어머니의 아픔을 나누어 앓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지구 어머니의 젖가슴은 파헤쳐졌고 자궁은 황폐해졌다. 인류는 지금도 더욱더 파헤치고 잘라내어 쓸모없는 것들을 대량생산해서 쓰레기를 만들고, 어머니의 몸 여기저기를 더럽히고 있다. 어머니는 아프다. 나도 그 아픔의 일부이다.”

그녀가 세상에 내놓은 일기모음집 제목은 ‘춤추는 나무’였는데, 가만 누워 있으니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만 바라보아도 탄성이 나온다던 기자영은 “숨 쉬고 눈을 떠 그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의 충만한 행복과 기쁨. 불편한 육체 속에서 빛나는 영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통증 속에서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바람에 한껏 몸을 맡기고 춤추는 나무처럼, 모든 상황과 흐름에 심신을 맡기는 것”뿐이었지요. 그 사람은 무너진 몸을 따라서 충분히 낮아질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제 고통을 통해 세상이 겪는 고통을 헤아렸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충만하게 만났던 사람입니다.

정말 중요한 걸 짚어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 우리 신앙인들도 헛다리 짚지 말고 복음이 지시하는 게 정말 뭘까, 생각하는 겨울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바람이 차더라도 가슴은 따뜻해 질 것입니다. 그분을 발견한 기쁨으로.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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