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낯선 분] 오히려 세리와 죄인과 사마리아 사람의 하느님
상태바
[예수, 그 낯선 분] 오히려 세리와 죄인과 사마리아 사람의 하느님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6.11.28 10: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 6
돌아온 탕자(Rembrandt,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9, The Hermitage, St. Petersbur, Russia

역사의 예수가 시작한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는 그의 정신과 가치가 실현되는 자리였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올바른 관계가 실현되는 자리였다. 즉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관계와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수평적 관계가 회복되고 올바른 관계가 실현되는 공동체였다. 이와 같이 예수가 시작한 대안적 공동체 운동은 올바른 관계의 회복 운동이었다.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로 막는 일체의 경계들을 무효화시키는 일을 시작하였다.

예수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병자, 불구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죄인으로, 부정(不淨)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었으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주변으로, 변두리로 내몰려야 했다. 그들은 하느님과도, 다른 인간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가 없었다. 예수가 그들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이러한 단절된 관계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리와 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이어서 그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도 부정한 일로 취급되었다. 예수는 관계를 단절시키고 왜곡시키는 일체의 경계들을 허물어 버렸다. 이러한 그의 정신이 가장 잘 표현되는 자리가 바로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탁 공동체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루카 15장의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탁 공동체를 실천하였고 그것을 비판하는 이들에 대하여 세 가지의 비유, 특히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발설하였던 것이다.

신약성경의 복음서들 중에서 특히 루카 복음서에서 세리와 죄인들에 대한 관심이 강하게 부각된다. 루카 5,27-32에서 예수는 세리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고, 세리들과 함께 식사한다. 루카 7,34에서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불린다. 그리고 루카 7,36-50에서 예수는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고, 루카 13,1-5에서는 회개를 강조한다.

세리와 죄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역사가이며 신학자인 복음사가 루카의 핵심적 사상인 “구원의 보편주의”와 관련이 있다. 예수는 온갖 차별의 장벽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을 구원에로 초대한다. 이러한 신학 사상에 따라 루카 복음서의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우선적인 사랑과 관심을 베푼다. 예수와의 친교는 특히 식탁 공동체에서 잘 드러난다.

이 구원의 보편주의는 루카 복음서 안에서 사마리아인에 대한 관심에서 잘 드러난다. 루카 9,51-56에서 예수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마리아의 마을에 징벌을 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루카 10,29-37에서 예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발설한다.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의 탁월한 모범으로 제시된다.

사실 예수가 사마리아인을 모범으로 제시하였을 때 그것은 유다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루카 10,33의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 본문 루카 15,20에서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우리는 “함께 아파하기”(compassion)의 에토스를 발견한다.

구원의 보편주의에 따른 사마리아인에 대한 관심은 루카 17,11-19에도 나타난다. 이 본문에서 예수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었는데, 그들 중에서 예수에게 감사를 표시한 이는 유일하게 사마리아인이다. 그리고 루카 복음서의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잘 드러나는 본문은 루카 19,1-10의 자캐오 이야기이다. 이 자캐오의 이야기에는 우리 비유와 함께 잃은 이들에 대한 관심이 잘 드러난다. 루카 15,24에서 아버지는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라고 말하고 루카 15,32에서는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라고 말한다.

잃어버린 사람들, 죄인들에 대한 루카 신학의 관심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죄수 장면인 루카 23,39-43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 죄수는 십자가에 매달린 상태에서 회개하였고 예수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라는 구원의 선언을 듣게 된다. 여기에서 “오늘”은 루카 19,5.9에서처럼 구원의 현재를 가리킨다. 이 “오늘”의 의미는 다른 루카 복음서의 구절에서도 중요하게 나타난다.

루카 2,11에서 주님의 천사는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예수의 탄생을 알리며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의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문맥에서 우리는 루카의 신학 사상인 구원의 보편주의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