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도 경제논리...복음은 뒷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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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도 경제논리...복음은 뒷전
  • 김경집
  • 승인 2016.09.19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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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추석 며칠 앞두고 경주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5.8의 지진이 발생했다. 한반도의 남동부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정작 정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지진이 예고도 예후도 없기에 미리 예측할 수는 없다지만 적어도 가장 빠르게 통보하고 대응방식을 전파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통령도 주무장관도 없었고, 정작 발표는 과장급이 몇 시간 뒤에 했다. 여름 무더위에는 하루에도 귀찮을 지경으로 자주 재난문자를 보내더니 정작 지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일본의 경우 수상이 지진발생 15분 만에 TV에 나타나 시민들을 위로하고 진정시키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하는 것과 직접 비교하는 건 조금 무리이기는 하다. 지진이 예사로운 나라와 강진은 거의 없는 나라의 대응에 차이가 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점을 고려해도 이건 숫제 정부가 아니다 싶다.

협력업체 직원이라도 같은 목숨이거늘

다행히 큰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두 사람의 죽음에 주목해야 한다. 선로에 자갈을 교체하는 야간작업을 수행하던 노동자 두 명이 뒤늦게 출발하고 속도를 늦춰서 들어온 기차에 치어 죽었고 두 명이 다쳤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들은 생명과 직결된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관련정보도 전달받지 못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아무리 코레일 정규직이 아닌 협력업체 직원이라도 같은 목숨이거늘.

성과주의에 매몰된 정부와 코레일의 사장이 오직 이익에만 매달려 많은 직원들을 쫓아내 업무를 외주화하면서 노동강도는 강해지고 임금은 낮으면서도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다. 남은 직원들도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려 자살하는 경우가 속출해도 눈 하나 끔쩍하지 않았다. 특히 사무직보다 근로직을 줄인 방식은 필연적으로 사고가 속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배양한다. 그런데도 당장의 성과만 자랑하고 그것을 토대로 사장은 비례대표 국회의원 자리 하나 얻는 데에만 혈안이었고 바람대로 그리 되었다. 그 와중에 죽어나는 건 약자들뿐이다.

국가기관이나 공기업은 무조건 이익을 추구하는 기구가 아니다. 공공재를 다루면서 손실이 생기면 세금으로 충당해주는 건 무능해서도 경영의지가 없어서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인력과 인권에 대한 의식이 결여된 건 심각한 일이다. 사람 목숨보다 돈과 효율이 중요한 사회가 만들어낸 비극이고 참사다. 죽고 다친 노동자들이 코레일 정규직이 아닌 협력업체 직원이고 비정규직이 된 것은 코레일이 이익을 위해 직원을 줄이며 해당 업무를 외주화했기 때문이다.

전태일의 손. 사진=한상봉

정작 사무직은 손대지 않고 근로직 위주로 감원한 까닭에 남은 근로자들도 업무에 버겁다. 그런데 코레일은 심지어 안전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마저 외주화시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헐값으로 업무를 떠넘겼다. 오죽하면 자살하는 경우까지 생길까!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성장과 성과에만 매달리는 일이 공공부문까지 보편화되면서 그만큼 이 사회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생태를 만들었다.

이번 사고에서 생명과 직접 관련된 정보조차 알려주지 않은 코레일은 오히려 작업자들이 작업 승인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선로에 들어갔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발뺌했다. 설령 그랬다 치더라도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거늘 그들에게 정보를 알려주는 게 그리 힘들다는 말인가? 자기네들은 노동자가 아니란 말인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공기업을 매각하거나 민영화하면서 일찌감치 예측된 일이었다. 거기에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며 감원과 외주화에 혈안일 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외주업체와 거기 속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떠넘겼다. 구의역에서 채 스물도 안 된 청년노동자가 죽고 남양주 지하철 공사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4명이 죽고 열 명 넘게 다쳐도 다 남의 일이었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비정규직, 외주화, 용역업체 중심의 교회

이래서는 안 된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무슨 발언을 했는가? 그저 애도의 인사쯤으로 갈음할 일이 아니다. 이 비극의 구조적 모순과 사회의 적폐를 비판하고 각성을 촉구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교회가 그럴 수 있을까? 정작 자신들도 비정규직을 고용하고 외주화하며 용역업체에 떠넘기고 있는 교회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하겠는가. 고작 한다는 게 마구 부풀리며 공포와 불안으로 자신들의 안위에만 집착하는 정부와 인사들의 안보타령에 장단이나 맞추고 있지 않은가.

하느님이 주신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 대통령도 재벌총수도 하나의 목숨을 갖고 있다. 모든 이들의 목숨은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하청업체나 외주업체의 노동자들의 사고 사망 비율은 갈수록 증가하여 40%를 넘어서고 있다. 갈수록 그 정도는 심해질 것이다. 단지 부자들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마른 수건 쥐어짜듯 몰아대는 세태에 대해 교회가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된다. 약자들이 극한의 위험 속에 노출된 채 살아야 하는 것이 관행일 수는 없다. 안전업무까지 외주화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힘든 일 다 떠넘기면서 이익은 챙기고 책임은 외면하는 현실이 지옥과 무엇이 다른가.

복음은 사랑이고 희망이며 인간존엄성의 보루

예수님께서 만나 복음을 전했던 이들은 절대다수가 가난하고 힘없으며 병든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용기를 북돋웠다. 그렇다고 그냥 선언적 메시지만 전하지 않으셨다. 부패한 기득권자들과, 그들과 결탁하여 종교권력을 행사하던 자들을 매섭게 질타하고 억압과 착취를 비판했다. 그 안에 깃든 핵심은 바로 사랑이며 인간해방이다. 그게 바로 복음이다. 돈과 권력이 탐욕이라는 접착제로 똘똘 뭉쳐진 사회는 강고한 성채처럼 보인다. 그러나 복음서는 분명히 말한다. 성전의 돌과 장엄한 건물에 감탄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지금도 그대로 유효하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 13, 2)

힘없고 약한 사람들의 목숨이 파리 목숨과 같다. 재벌은 수백 조의 돈을 쥐고 쌓아 놓고서도 이윤에만 몰두하고 정부는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재벌 편 들어주기에 급급하다. 그 카르텔 속에서 한 가정의 가장이 죽고 희망의 자식이 쓰러지고 있다. 그런데도 교회는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외면한다. 복음은 사랑이고 희망이며 인간존엄성의 보루다. 그런데 그것들이 하나 둘 붕괴되고 있다.

강진에도 큰 인명피해가 없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지진 피해의 간접적 결과로 두 목숨을 잃었다. 그걸 주목해야 한다. 천재지변보다 인재(人災)를 경계해야 한다. 그 인재가 불의와 욕망의 산물이라면 교회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비판하고 각성을 촉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부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경제논리가 아니라 복음의 논리가 우선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실현해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게 이 시대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의 예언자 정신이다. 이제 제발 정신 좀 차리자.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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