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아무도 주님께 여관방을 양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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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아무도 주님께 여관방을 양보하지 않았다
  • 김경집
  • 승인 2016.12.20 12: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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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해마다 성탄이 되면 나는 복음서에서 예수 탄생의 스토리를 읽다가 늘 멈칫하는 대목이 있다. 바로 베들레헴 여관에 있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멀리서 찾아온 동방박사들이나 목자들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성탄 때마다 구유 경배 예절을 행하면서 마치 나도 그 중의 하나인 양 착각(?)한다. 그런 희망과 동참의 갈망을 탓할 일은 아니다. 나 또한 그런 밝은 눈과 따뜻한 심장을 지녀 멀리서도 예수님의 강생을 깨닫고 먼 길 마다하지 않으며 기쁘게 찾아가 경배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러나 내 모습은 거기에 없다. 슬프지만 그게 현실이고 진실이다. 나는 그럼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 여관에 먼저 와있던 투숙객 가운데 한 사람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일찍 길을 나섰고 일찌감치 여관에 도착하여 방을 얻었을 것이다. 그 몫을 지불한 사람들이니 그럴 자격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함께 가는 사람이 불편한 몸 상태였다면 그 사람을 팽개치고 가지 않는 한 내 속도가 그에게 맞출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늦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삭의 아내가 그 힘든 길을 걸어야 하니 얼마나 자주 가던 길 멈췄을까. 요셉의 마음은 또 얼마나 불안하고 안쓰러웠을까.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겨운 아내를 업을 수도 없고 기껏해야 옆에서 손을 잡아주거나 부축하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니 더 안타깝다.

그렇게 힘겹게 먼 길을 걷고 마침내 도착한 여관. 해는 뉘엿뉘엿 지고 어둠이 드리운 시간, 몸은 천근만근인데 마음은 아내의 상태에 온통 집중된 요셉에게 허락된 방은 없었다. 난감한 일이다.

그날 밤 아무도 산모에게 방을 양보하지 않았다

아마도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에 들어섰을 때 이미 방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도 기척을 들었을 것이고 궁금하기도 하고 무료하기도 해서 방문을 열고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늦은 시간에 찾아온 이들은 만삭의 배를 힘겹게 움켜쥔 여자와 안절부절해 하는 남자가 아닌가. 여자의 배를 보건대 곧 출산을 앞둔 산모다. 여관 주인은 방이 없다고 말한다.

두 사람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본 투숙객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누가 봐도 안쓰럽고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방을 내주며 산모에게 양보한 사람은 없다. 각자 정당하게 얻은 방이고 일찌감치 움직인 덕분에 차지한 공간이다. 그래도 누구나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보면 측은지심이 생기는 법이니 고민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양보의 주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길 바랐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 미루다가 민망하고 미안해서 슬그머니 방문을 닫았을 것이다. 물론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여관 주인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자신의 눈으로 봐도 출산이 임박한 산모의 모습이 딱하다. 그러나 이미 투숙한 손님에게 양보하라 할 수도 없다. 그 사람이 마구간을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거니와 그걸 돈 받을 수도 없다. 그러나 지금 막 들어온 사람들로서는 마구간이라도 감지덕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약간의 돈이라도 지불할 것이다. 그러니 여관 주인으로서는 마다할 일 아니니 굳이 다른 숙박객에게 방을 양보하라 할 일도 없다.

예수아기는 세상의 외면을 받으며 태어났다

그렇게 모두 잠에 들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아이를 낳았다. 초산에 쉬운 출산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니 쉽게 태어나도록 배려되었을 것이라는 건 따질 일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모두와 똑같은 방식으로 태어나셨을 것이다. 조용한 출산이 아니다. 아무리 깊은 잠에 빠졌다 해도 그 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다.

그런데 그 출산이 마구간에서 일어난 일 아닌가! 얼른 방문을 열고 뛰어나와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 “세상에! 어찌 이런 곳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말입니까? 미안합니다. 아까 방을 양보해드렸어야 하는데. 어쨌거나 우선 산모와 아이를 방으로 옮깁시다.” 그러나 아무도 방문을 열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외면 속에 태어나신 것이다.

요한 복음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 9~11)

엉뚱하게(?) 멀리서 동방박사들이 찾아오고 목자들이 찾아왔다.(마태오 복음서에는 ‘동방박사들’이, 루카 복음서에는 ‘목자들’이 왔다고 기술되었다. 그것은 복음서의 공동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동방박사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목자는 ‘예언자’로 오신 예수님을 지향하는 뜻일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아예 예수님의 탄생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동방박사도 목자도 어니다...그저 투숙객이었을뿐

나의 모습은 어디에 있을까? 구유 예절 때 내가 동방박사의 한 사람이거나 목자의 한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그럴 수는 있다. 마음으로는 그러고 싶으니까. 그러나 나는 여관에 함께 묵었던 그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언급한 ‘외면한 세상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서도 외면한 여관 투숙객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문제는 지금도 내가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외면하고 싶다는 점이다. 나는 교회에 다니니까, 예수님을 믿으니까 그 정도의 대접은 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과연 내가 온전하게 그 복음에 따라 철저하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 탄생의 진정한 의미를 온전히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며 사는지 스스로 물어보면 두렵고 떨릴 뿐이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면책이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복음의 은총을 받았으면서도 정작 삶에서 실천하지 않고 사회적 불의에 대해 외면하고 있다는 점은 더 큰 비난과 질책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알고도 하지 않은 건 더 큰 죄악이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나의 모습은 복음서에 도처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예수님을 만나서 삶이 바뀌고 세상을 올바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민중이 아니라 기득권과 배타적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율법학자들의 모습이다. 나는 바리사이일 뿐이다. 불행히도 상당히 많은 수의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은 사두가이의 모습이다. 그게 우리의 현재의 모습이다.

예수는 누군가 외면 받는 그곳에 거듭 태어나신다

대림절은 그냥 단순히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다. 다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외면하거나 모르고 지나가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자각과 성찰의 시간이다. 적어도 그 기간만이라도 제 정신 차리고 세상을 올바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간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2천여 년 전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세상에 태어나신다.

그분이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처럼 세상의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곳에 오신다. 성탄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불우이웃을 찾아 작은 정성을 전하는 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다. 그런 이들 사는 세상을 개선해야 하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쳐야 한다. 우리의 탐욕을 거두고 불의에 눈 감은 비겁을 버려야 한다.

나는 예수님의 탄생의 현장에 있었으면서도 정작 내 자리를 내드리지도 않았고 옆에서 시중을 들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먼저 차지한 따뜻한 내 방을 고수했을 뿐이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내 방을 지키고 있다. 이러면서 성탄 운운하는 게 부끄럽고 두렵다.

지금 예수님은 어디에서 태어나실까? 화려한 저택은 분명 아닐 것이고 평당 1천만 원 이상의 아파트도 아닐 것이며 소박한 듯 그러나 기실 아름답게 꾸며진, 성당의 구유도 아닐 것이다. 그분은 지금 가장 가난하고 힘없고 약한 이들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실 것이다. 그게 마구간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의미고 복음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높은 곳 돈 많은 곳 잘난 사람들 모여 있는 곳만 바라본다. 그러면서 정작 예수님 태어나시는 마구간, 즉 오늘의 험하고 어려운 곳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모인 곳은 바라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유린되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짓밟히는 걸 보면서도 외면하거나 심지어 그 폭력에 가담하고 있지는 않은지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야 한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주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중략)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루카 1, 46~53)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의 찬미가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성찰해야 하는 그런 성탄을 맞아야겠다. 더 이상 방을 굳게 지킨 투숙객도, 사두가이나 바리사이도 되지 않기 위해서 차가운 들판으로 나가 힘든 이들 힘차게 안아 체온이나마 나눠야겠다.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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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 2016-12-21 16:01:52
나는 어디에 있을까? 깊은 성찰을 요청하시는 글 잘읽었습니다. 저도 여관 투숙객의 자리에 있는 것 아닌지~~ 거룩한 예수의 탄생의 거처에 있었다며 만족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