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은 사실상 우상파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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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은 사실상 우상파괴이다
  • 한상봉
  • 승인 2023.08.14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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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유신론 : 하느님에 대한 고정관념

지금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통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고정적 이미지는 어떠한가? 하느님은 존재의 피라미드 최상부에 위치한 ‘군주’의 모습이다. 하늘에 머물면서 우주를 지배하고 인간행위를 심판하는 강력한 존재다. 그는 우리에게서 아주 먼 곳에 위치하며 지배하는 남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세상을 사랑하지만 세상의 불결함에 물들지 않는 위풍당당한 입법자이다. 이런 권력의 정점에 있는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가 그 사회와 교회와 가족의 권위적 구조를 강화시킨다.

이런 하느님 이미지가 무신론의 토양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비판하는 하느님은,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아무리 큰 존재라 하더라도, 흰 수염을 기른 그렇고 그런 부류”로 상상된다. 즉, 하느님을 하늘에 있는 매우 강력하고 거대한 ‘노인’으로 보고 있다. 이런 하느님이 비판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을 참칭한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은 사실상 ‘우상파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계몽주의 이후 신학자들이 철학을 빌려 설명한 하느님도 문제다. 이들은 추론을 이용해, 하느님을 유한한 피조물과 달리 불변의(변하는 피조물에 비해), 무형의(형태가 있는 육신에 반하여), 고통이 없는(고통을 느끼는 피조물에 반해), 전지전능하며, 어디에나 있는 존재로, 힘과 지식과 실재에서 한계가 없는 분이라고 설명한다. 이게 ‘현대유신론’이다. 결국 하느님은 웅장한 노인, 경찰, 부모의 콤플렉스를 감싸주는 붕대, 완벽한 성직자, 관리감독, 지배자, 실망스런 보호자, 흥을 깨는 사람 같은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현대신학자들은 그분을 일정한 장소에 갇히지 않고 우리와 함께 가까이 계신 분으로 고백한다. 하느님은 추악한 역사와 더러운 세상에 다가서서 인류와 함께 고통 받으며 연민과 해방의 사랑을 드러내는 분이며, 사실상 지배권력의 주변부에 위치한 분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현대에 와서야 되찾은 하느님 이미지는 역설적이게도 전통적인 믿음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하느님 탐색 여행의 근본규칙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가까울 것이라고 믿지만, 그때조차도 살아계신 하느님은 형언할 수 없는 신비에 머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듯이, 우리는 어둠 속에서 금 간 거울을 보듯, 오직 희미하게 하느님을 볼 뿐이다.(1코린 13,12)

실상 하느님은 우리가 계산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 논문을 준비하다가 지중해 해변가에서 만난 아이의 이야기가 그것을 잘 드러내 준다. 아이가 통에 물을 가득 담아 모래구멍에 넣느라 분주하다. 주교가 호기심으로 뭐하냐고 묻는다. 아이는 “바다를 구멍에 넣는 거예요.” 그게 가능하냐고 타이르자 아이가 다시 말한다. “삼위일체의 비밀 역시 당신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소. 그건 마음보다 훨씬 크다오.” 다 마셔버릴 수 없는 바다처럼 하느님은 인간의 의식과 경험을 넘어선다.

칼 라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거대한 대양 한가운데의 작은 섬과 같다. 섬은 바닷속으로 뻗어 나가지만, 대양의 깊이는 항상 섬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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