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하고 순진하며 낡아빠진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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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하고 순진하며 낡아빠진 하느님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07.30 14: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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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A. 존슨 [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강독-1

어느날 사도 바오로와 나르나바는 루스두라에서 설교하다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남자를 치료해 주었다. 한 번도 걷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그 사람이 치유되자, 마을 사람들과 사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라고 생각해, 소와 꽃을 가져와 두 사람 앞에서 제사를 올리려고 하였다. 이 광경에 넋이 나간 사도들은 그들을 헤치고 나가 소리쳤다.

“여러분,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 14,15)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믿고,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작심한 사람들이다.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을 입에 올리지만, 이명박이나 윤석열의 하느님과 안중근 의사이나 함석헌 선생이 고백한 하느님이 다르고,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종이 고백하는 하느님이 같은 분일 수 없다. 그래서 “각인각색의 하느님”이라고 말하면 불경할까?

이처럼 ‘하느님’이란 호칭은 갈등적이고 진부하며 낡은 말처럼 들린다. 우상과 하느님이 혼동되기 쉬운 현대교회에서, 특출난 신학자들은 현대세계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 여전히 분투하고 있으며, 새로운 고백 안에서 ‘신학의 혁명’을 경험하고 있다.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A. 존슨, 북인더갭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A. 존슨, 북인더갭

‘연민하며 저항하는 사랑의 주를 찾아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라는 책을 지은 엘리자베스 A. 존슨은 칼 라너가 “역사는 하느님의 자기계시 과정”이라는 말한 것처럼, 우리가 최근 100년 동안 경험한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름’에 주목하면서, 우상과 구별되는 하느님을 찾아 나서고 있다. 그리고 그가 경험한 세계는 “인간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현실에 대한 통절한 각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는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더 있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처한 낯선 상황 한가운데 생생하게 임재하시는 하느님의 영을 구한다. 오래 잊혀진 측면들이 최근의 사건들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관계를 이끌어내고 그 결과 하느님의 깊은 연민은 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새롭게 인식되기도 한다.

5세기 북아프리카의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는 ‘오 아름다운 이여, 언제나 아주 오래된, 언제나 새로운 분이여, 저는 너무 늦게 당신을 사랑했습니다.’라고 외쳤다. 20세기 중반 이후로 사실상 여러 상황 속에 놓였던 신자들은 이 오래된 아름다움을 항상 새로운 용어로 구하고, 발견하고, 표현해 왔다.”(존슨)

이러한 노력들은 학술적이거나 지적인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실제적 행동에서 나온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진부하고 순진하며 낡아빠진 생각은 더 이상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숙한 믿음을 향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악한 시대에 맞선 그들의 투쟁에 걸맞은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 맺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래서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통찰은 한마디로 “심장에서 시작해서 머리와 손으로 발전해 간다”고 존슨은 말한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의 원제는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한 탐구”(Quest for the living God)이다. 이처럼 이 책은 오늘날 살아있는 전통이 체험하는 살아있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더듬고 있다. 이스라엘 전통 속에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은 역동적이고 자비로우며 경이에 가득 차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시내산의 불길에서 터져나오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고”(신명기 5,26), 약속된 땅으로 가로질러 갈 때 “살아계신 하느님이 너희 곁에 있음”(여호수아 3,10)을 알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자녀들이”(마태 16,16) 변방의 유대인이었던 예수 그리스도 덕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마 9,26)이 되었다고 여겼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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