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돌아서는 곳마다, 거기 신의 얼굴이 있다
상태바
네가 돌아서는 곳마다, 거기 신의 얼굴이 있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08.06 15: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엘리자베스 A. 존슨 [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강독-2

인류 역사의 여명기부터 사람들은 ‘신성한 힘에 휩싸여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왔다. 통제할 수 없으나 함께 살아가는, 어떤 목적으로 가득 찬, 세상에 두루 퍼져 있지만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삶의 향방이 정해진다고 생각했다. 이 힘을 상징과 제의를 통해 드러냈는데, 이게 종교이며 하느님에 대한 경험이다. 이 힘은 파악할 수 없지만 실재하는, 마치 구름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이 존재를 ‘신성’(the Holy)이라고 불렀는데, 신비(mysterium)하고, 경탄(Tremendum)할만하고 황홀(Fascinans)한 ‘어떤 것’이었다. 신성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신비이며, 길들여지지 않고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며 세계가 흔들리는 것 같은 경외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달아날 수 없도록 우리를 매혹시키며 도취시키는 힘이다.

이런 체험들을 글이나 의식, 행위에 담아 표현했는데, 이런 경험은 공동체의 삶 안에서 전수되어 신성에 대한 감각이 계승되었다. 이게 종교성이다.

 

사진출처/북인더갭
사진출처/북인더갭

여전히 하느님 '찾는' 경전의 사람들

계시종교에 속하는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는 신성에 대한 감각과 믿음이 구약과 신약, 쿠란이라는 경전에 확정적으로 전달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신성에 대한 절대적 지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종교에서도 ‘하느님 찾기’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왜? 경전의 진리 역시 역사적 경험 속에서 다시 해석되고, 새로운 이해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살아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하느님, 주님은 나의 하느님입니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시편 63,1)


바빌로니아 유배의 재앙을 목격한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희망을 선포한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주겠다.”(예레 29,12-14)

하느님은 지루하게 고정된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찾는 탐색은 일종의 흥미진진한 모험이 된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평생 수행을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평생 하느님을 찾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예수님 역시 먹을 것과 입는 것을 걱정하는 대신에 하느님을 찾으라고 권한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으라.”(마태 6,33) 여기서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은 동의어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주실 것이다. ”(마태 7,7-8)

이 길에서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행위는 잃은 자를 찾는 하느님의 행위와 마주친다. 하느님은 숨어 있는 당신을 인간이 찾아낼 때까지 그냥 구석에 앉아서 기다리고만 계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동전을 잃은 여인처럼, 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처럼 인간을 찾아다니신다. 그리고 탕자와 죄인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환대하신다. 예수님 역시 “사람의 아들은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고 사명을 밝힌다.

심지어 쿠란에서도 “네가 돌아서는 곳마다, 거기 신의 얼굴이 있다”(코란 2,115)고 말한다. “신을 얼굴을 찾아 밤낮으로 구하는 자들을 친절히 대하라”(쿠란 18,28-29)고 말하며, 진실한 무슬림은 평생을 신의 얼굴을 찾기 위해 간구한다. 이렇게 신의 얼굴을 찾는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당신이 이해했다면, 그건 하느님이 아니다”(설교 117,5)라고 말한 것처럼, 하느님은 형언할 수 없는 영원한 타자이기 때문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