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리스, 티베리아스, 도시 밖에 있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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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리스, 티베리아스, 도시 밖에 있는 예수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6.08.1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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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운동과 마을 공동체 - 2
사진=한상봉

여러 차례(1908년, 1931년, 1980년대)에 걸친 고고학적 발굴은 세포리스에서 다양한 유적을 발견하였다. 로마 시대의 반원형 야외극장은 약 4000-5000명을 수용할 정도의 큰 규모이다. 이 야외극장의 건축 시기에 대하여 고고학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었다. 기원후 1세기 초반을 주장하기도 하고 기원후 2세기를 주장하기도 한다.

몇몇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가 세포리스를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 도시의 건설에 참여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헬레니즘적 도시인 세포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분의 말씀 중 “위선자”(hypocrites)라는 표현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사실 이 표현은 극장의 배우를 가리키는데, 이것을 예수님은 극장이 있던 세포리스에서 배웠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마르 6,3에서 “목수”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테크톤(tekton)은 단지 나무를 다루는 목수뿐 아니라 돌을 다루기도 하고 다른 기술도 가진 넓은 의미의 기술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요셉이나 예수가 나자렛에서 가까운 세포리스에서 기술자로서 일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대로 학자들 사이에는 세포리스에서 발견된 야외 극장의 건설 시기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있다. 비록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작은 규모나마 야외극장이 건설되었다 하더라도 그 시기에 요셉이나 예수가 그 건설 현장에서 일하였을 가능성은 여전히 가능성만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헬레니즘적 도시와 그 문화가 예수의 생애와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과장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의 “위선자”(마태 23,23.25.27.29)라는 표현이 세포리스의 언어와 문화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기원후 18년경에 도시를 건설하고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기원후 14-37년)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그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스'로 명명하였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의 수도를 세포리스에서 티베리아스로 옮겼다. 그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재능 있는 통치자요 정치가로 역사가에 의해 평가되기도 한다.

요세푸스의 문헌에 따르면, 헤로데 안티파스는 티베리아스에 다양한 공공건물들, 즉 경기장, 궁전, 회당 등을 건설하였다. 궁전은 황금 지붕을 가지고 있었고,(<생애> 66) 회당은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건물이었다.(<생애> 277) 헤로데 안티파스의 후계자 아그리파 1세(37-44년)가 죽은 후 티베리아스는 유다의 로마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61년에 네로 황제는 이 도시를 아그리파 2세(53-100년)에게 주었는데 그의 수도는 카이사리아 필리피였다.(<생애> 38)

제1차 유다 항쟁(66-70년) 동안 티베리아스의 귀족들은 아그리파 2세와 로마인들을 지지하였다. 이 시기에 요세푸스는 티베리아스를 요새화하였다(<유다 전쟁사> 2권 572-573). 그리고 제2차 유다 항쟁(132-136년) 이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년)는 이 도시를 이방인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런데 기원후 2세기 중엽에 라삐 시메온 바르 요카이(Rabbi Simeon Bar Yochai)가 티베리아스를 정화하였다. 그 후 이 도시에는 세포리스에 있던 여러 유다인들의 제도와 기관들이 옮겨졌고, 유다인들의 종교와 학문의 중심지가 된다.

이러한 갈릴래아의 여러 도시들과는 달리 예수는 주로 나자렛, 카파르나움 등과 같은 시골 마을과 고을에서 활동하셨다. 물론 그는 시리아의 도시들인 티로와 시돈, 그리고 남쪽으로 예루살렘으로도 갔다. 당시 도시와 그 주변의 시골 지역들로 이루어진 지리적 구조는 다음 복음서들의 구절들에서도 확인된다.

예수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마르 8,27), 티로와 시돈의 주변 지역(마르 7,24-31)으로 갔다. 헤로데 대왕은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학살하였다.(마태 2,16) 예수 당시에 예루살렘은 유다와 갈릴래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예루살렘의 성전에 기반을 둔 지배 엘리트는 세례자 요한에게 질문하기 위하여 예루살렘과 갈릴래아 사이에 있던 베타니아로 대표자들을 보낸다.(요한 1,19-28) 그리고 예루살렘의 지배 엘리트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갈릴래아로 와서 예수에게 질문한다.(마태 15,1)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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