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도시에 맞선 시골 운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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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도시에 맞선 시골 운동가였다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6.08.08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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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운동과 마을 공동체 - 1
사진=김용길

[송창현 신부: 예수 그 낯선 분 -13]

역사의 예수는 하나의 운동을 시작한 사람(movement initiator)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여느 역사상의 위인들처럼 정치 권력자도 아니었고 큰 군대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예수는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실천하였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하나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예수 운동(Jesus movement)은 바로 하느님 나라 운동이었다. 예수는 마을 공동체들 안에서 활동하였고, 선포하고 치유하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제자들을 마을들로 파견하였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서 예수 운동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탐구는 다양한 사회학적 방법론들의 적용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그런데 구조주의적이고 기능주의적 사회학은 어떤 사회 현상이 전체 사회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주목한다. 그래서 이 방법론은 정치, 경제, 종교적 권력 관계와 사회-정치적 갈등의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구조주의적이고 기능주의적 사회학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지적하면서 예수 운동의 사회적 배경인 마을 공동체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기원후 1세기의 팔레스티나는 갈등 속의 세계였다. 예수 당시의 로마 제국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긴장과 갈등 위에 세워진 농업 사회였다. 당시의 팔레스티나는 로마 총독의 통치, 갈릴래아와 그 주변 지역을 다스렸던 헤로데 가문의 피보호자 통치와 예루살렘의 대사제 가문들을 통한 로마 제국의 식민지 지배 아래 있었다. 따라서 갈등은 도시에 기반을 둔 지배 계층과 시골 마을에 살았던 피지배자 사이의 이념적 충돌이었다. 로마 제국은 물리적 점령뿐 아니라 이념적 지배를 추구하였다.

로마 제국의 지리적 구조는 여러 도시와 그 주변의 시골 지역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골의 마을들은 도시에 종속되어 있었다. 농촌 지역은 도시가 요구하는 식량과 다른 생산물들을 생산하였다. 도시는 그 농촌의 생산물을 소비하였다. 또한 도시는 필요한 기술을 제공하고, 무역과 상업에 참여하며, 제국의 행정과 안전을 위한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도시와 시골 마을의 관계는 전체 사회-정치적 구조 안에서 위계질서와 착취의 성격을 드러내며 경제생활에서의 불평등을 반영한다.

이와 같이 도시는 지배 엘리트 권력의 중심지였으며, 주변 지역의 마을들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 통제를 확대시켰다. 지배 계층은 그들의 권력, 부, 지위를 과시, 보호, 향상시키기 위하여 도시와 시골 마을의 체제를 운영하였다. 그래서 도시는 지배 엘리트의 통제와 사회적 위계질서의 표현이었다.

도시 생활에서 정치, 상업, 종교, 사회, 주거 등의 측면들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었다. 도시는 관공서, 재판정, 성전 등과 같이 정치적, 종교적 권력을 드러내는 건축물들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극장, 경기장, 광장 등과 같이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들은 오락, 종교적 제전, 무역을 통해 지배 엘리트의 통제를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

예수 당시의 갈릴래아에도 카이사리아와 필리피, 세포리스와 티베리아스 등과 같은 중요한 도시들이 존재했다. 이중 세포리스와 티베리아스는 복음서에 언급되지 않는다.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9년)는 세포리스 도시를 재건축하고 요새화하였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문헌들에서 세포리스를 다양하게 묘사한다. 그는 세포리스를 “갈릴래아에서 가장 강한 도시”(<유다 전쟁사> 2권 511)라고 표현한다.

그는 세포리스와 관련하여,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포리스 부근의 성벽을 쌓았고”, “나라의 중심도시로 삼았다.”(<유다 전쟁사> 18권 27)고 기록한다. 그리고 이 도시를 “온 갈릴래아의 장신구”(<유다 고대사> 18권 27)라고 표현한다.

세포리스는 제1차 유다 항쟁(66-70년) 동안 유다인들의 저항 운동에 반대하여 로마 제국의 편에 서게 되었다. 기원후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세포리스는 유다 교육과 최고 의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는 세포리스를 도시(polis)로 승격시켰다. 제2차 유다 항쟁(132-136년) 이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는 세포리스를 디오체사레아(Diocaesarea)로 불렀는데, 이 명칭은 “제우스(Zeus)와 체사르(Caesar)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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