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 가톨릭교회에 매력을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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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가톨릭교회에 매력을 느끼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07.2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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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고백에서 저항으로-1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숙적(宿敵)이다. 오늘 우리의 투쟁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투쟁이다.” 독일 신학자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값싼 은혜를 설교하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값싼 은혜는 “헐값에 팔리는 용서, 헐값에 팔리는 위로, 헐값에 팔리는 성찬,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무분별한 손으로 거침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 대가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의미한다. 본회퍼는 나치에 협력하며 부화뇌동하는 독일 개신교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였지만, 본회퍼의 경고는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가톨릭교회에도 그대로 내리 꽂히는 말이다.

가톨릭교회에선 온갖 기념일과 특별한 순간에 ‘전대사’를 남발한다. 연옥에서 받을 벌을 감해 준다고 해서 ‘감벌부’(減罰符)라고도 하는데, 전대사를 받는 조건으로 항시 등장하는 게 성지순례다. 그렇지만 만약 성지순례가 돈과 시간의 여유를 요구한다면, 은혜는 부자 그리스도인들에게 차고 넘칠 것이다. 이미 지은 죄야 어쩔 수 없지만, 계속 죄를 지어도 어쩔 수 없지만, 형벌을 줄이는 뾰족한 방법이 있다고 교회에서 가르친다면, 그것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부자들에겐 ‘땡큐’다. 이승에서 복락을 누리고 저승 가서도 안심이다. 이런 게 값싼 은혜다.

본회퍼는 “그런 교회에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은폐해 주는 값싼 덮개를 발견한다”고 했다. 허나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값비싼 은혜’를 구해야 한다. 진짜 은혜가 값비싼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목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 은혜를 주시려고 하느님도 자기 아들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셨다. 은혜는 ‘따름’의 결과이다.

여기서 본회퍼는 베드로 이야기를 꺼낸다. 베드로는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두 차례 받았다. 첫 번째, 호숫가에서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는 그물질을 그만두고 그분을 따른다. 마지막 경우는 옛 직업에 종사하던 베드로가 부활하신 그분을 호숫가에서 만나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듣는다.(마르 1,17; 요한 21,22) 그리고 그때마다 베드로는 예수께 “주님이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 한다. 이처럼 예수를 따르는 행위와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은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짝이다.

본회퍼는 “까마귀처럼 우리는 ‘값싼 은혜’라는 시체 주위에 모여, 그 시체로부터 독을 받아 마셨다. 그 결과, 예수 따르기가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말았다”고 말한다. 가톨릭교회에서도 예수 따르기는 성인들과 일부 수도자들에게 요구될 뿐, 대부분의 신자들은 교회전례 안에서 ‘그렇게 될지어다, 아멘’하고 기도하는 데 만족한다. 여기서 저렴한 신앙이 탄생한다. 값싼 신앙은 저렴한 은혜를 받고, 보잘 것 없는 영혼으로 만족한다. 위험부담도 없지만, 은혜로운 기쁨도 없다. 값싼 은혜를 선포하는 교회 안에 성령은 머물지 않는다.

 

본회퍼는 3 명의 형제와 4 명의 자매가 있습니다. 그의 부모는 카알 루드비히 본회퍼와 파울라 폰 헤세이다.
본회퍼는 3 명의 형제와 4 명의 자매가 있습니다. 그의 부모는 카알 루드비히 본회퍼와 파울라 폰 헤세이다.

전쟁은 낭만이 아니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 본회퍼(Karl Ludwig Bonhoeffer)는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정신의학과 신경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1912년 아버지가 베를린 대학교로 옮기면서 이사를 했고, 1914년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유년기부터 전쟁을 겪은 셈이다. 철없는 아이들은 집으로 뛰어가면서 “만세! 전쟁이다!” 하였지만 곧바로 어머니에게 뺨을 맞았던 시절이다. 본회퍼 집안은 전쟁을 반대하지도 않았지만, 축하할 생각도 없었다. 전쟁 초기에 남학생들 사이에는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달콤하고 고귀한 일”이라는 표어가 떠돌았다. 그들에게 제복을 입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낭만으로 여겨졌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전쟁에 나간 사촌 하나가 전사했고, 사촌 로타르는 한쪽 눈알이 빠지고 한쪽 다리가 으스러졌다.

1917년 장남과 차남인 카를 프리드리히와 발터가 소집명령을 받았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여덟 살부터 피아노 교습을 시작해 열두 살에는 시편 42편 6절 “내 영혼이 너무 낙심하였지만”을 토대로 칸타타를 작곡할 정도였는데, 발터가 입대하기 전 열렸던 송별만찬에서 <이 마지막 순간에 그대의 여행 중 안전을 비네>라는 곡을 편곡해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형에게 불러주었다. 어머니 파울라 본회퍼가 다음날 기차역에서 헤어지며 “우리를 떼어놓는 건 공간뿐이야.” 하였지만, 그로부터 두 주 뒤에 발터는 프랑스에서 부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 그때 발터 나이 18살이었다.

본회퍼, 신학을 택하다

오른편에서 두번째가 본회퍼.
오른편에서 두번째가 본회퍼.

열네 살이 되던 1920년, 디트리히는 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명석하고 합리성을 강조하던 이 집안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법학을 공부하고 나중에 독일 항공사 푸르트한자의 수석 변호사가 된 형 클라우스가 교회를 가리켜 “소시민적이고 따분하고 허약한 기관”이라고 비판하자, 디트리히는 “그러면 내가 개혁하면 되지 뭐!”라고 대꾸했다.

가족들의 질문은 쏟아졌다. “너는 예수가 무정부 상태를 원했다고 생각하니? 그분은 성전에 들어가 채찍으로 환전상들을 내쫓았잖아?” 하였다. 이미 과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큰형 카를 프리드리히는 디트리히가 입증 가능한 사실을 버리고 안개 같은 형이상학 속으로 달아나고 있다고 느꼈다. 부모 역시 적극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신학자의 길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디트리히에겐 음악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를린과 튀빙겐을 오가며 공부를 하는 동안, 1924년 디트리히는 형 클라우스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그곳에서 만난 것은 가톨릭이었고, 여기서 교회의 개념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추기경이 거행하는 성지주일 미사 때 제단에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는데, 백인과 흑인, 황인들이 통합된 성직 복장을 하고 교회의 이름 아래 있었다. 여기서 디트리히는 “인종을 뛰어넘고 민족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교회의 생생한 실체”를 보고서 감동한다. 교회는 독일 루터파 개신교 너머에 있는 보편적 신앙공동체였다. 이는 나치가 바라는 ‘혈통의 제한을 받는 교회’의 개념과 다른 생각이었다.

그는 성주간 내내 아침저녁으로 성 베드로 성당이나 성 요한 라테라노 성당에서 거행하는 미사에 참석했다. 하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할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로마 견학이 끝나기 전에 디트리히는 비오 11세 교황을 알현할 기회가 생겼는데, 기대한 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토요일, 교황을 알현했다. 커다란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알현은 인간미 없고 차가웠다. 의례적이었다. 교황은 상당히 냉담한 인상을 품겼다. 교황이라고 할 만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위엄도 없고 비범한 면도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그저 그랬다!”

하지만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점에서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매력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몇 년 뒤에 어느 토론모임에서 전한 짤막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톨릭교회는 하나의 세계 그 자체다. 무수한 다양성이 그 속에 녹아들고, 이 다채로운 그림은 가톨릭교회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더해 준다. 어느 나라도 가톨릭교회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가톨릭교회는 경탄할 만한 능력을 발휘하여 다양성 속의 일치를 유지하는 법, 대중들의 사랑과 존경을 얻는 법, 강력한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는 법을 알아냈다.

그러나 이 위대함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중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세계는 정말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지내왔는가? 가톨릭교회는 하느님께 이르는 길의 이정표가 되기는커녕 그 길의 장벽이 되지는 않았는가? ...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다른 이의 믿음을 억압할 생각이 전혀 없다. 하느님은 마지못해 하는 섬김을 원치 않으신다. 하느님은 각자에게 양심을 주셨다. 우리는 우리의 자매교회가 자기를 성찰하고 하느님의 말씀만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참고]

<디트리히 본회퍼>, 에릭 메택시스, 포이에마, 2018
<나를 따르라>, 본회퍼, 김순현 번역, 복있는 사람들, 2016 

*이 글의 축약본은 <가톨릭평론> 2020년 7-8월호에 실렸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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