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 성경에서 길을 찾다
상태바
본회퍼, 성경에서 길을 찾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07.20 17: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본회퍼, 고백에서 저항으로-2

신학자요 목회자, 본회퍼

1924년 베를린 대학교에 등록하고서 스승으로 만난 신학자는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이었다. 하르낙은 슐라이어마허의 제자로 역사비평 방법론의 선두주자이며,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였다. 본문비평과 역사비평에 한정된 하르낙의 성경접근법은 성경에 기술된 기적들은 사실이 아니며, 요한복음은 정경이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하르낙을 무척 존경했지만 신학적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조언자요 친구로 삼았던 신학적 스승은 괴팅겐의 카를 바르트(Karl Barth)였다.

칼 바르트
칼 바르트

바르트는 하르낙에게 신학적 폭탄을 떨어뜨린 장본인이었다. 바르트는 1922년에 펴낸 주석서 <로마서>를 통해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며 하느님을 ‘전적인 타자’로 불렀다. 또한 하느님을 계시를 거치지 않고서는 인간이 전혀 알 수 없는 분으로 묘사했다. 바르트는 1934년에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일에서 쫓겨났지만, 나중에 바르멘 선언의 기초자가 되어 나치를 거부하는 고백교회를 세우는데 기여했다.

본회퍼는 라인홀드 제베르크 밑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였는데 제목은 <성도들의 교제: 교회의 사회학에 대한 교의학적 연구>였다. 본회퍼는 교회를 역사적 실체나 제도와 동일시하지 않고 교회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했다. 사실상 본회퍼는 성경원전 학자이기를 거부한 철학자에 가까웠다. 1927년 박사학위를 받자 가족들은 본회퍼가 학자로 남기를 원했지만, 그는 목회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해 11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독일교회 부목사로 갔다. 스페인에 가기 전 파리를 들렀는데, 그곳에서 매춘부들의 교회를 경험했다.

“주일 오후에 나는 샤크레 쾨르 대성당에서 거행하는 성대한 미사에 참석했다. 교인들은 거의 다 몽마르트에서 온 이들이었다. 매춘부들과 그들의 남자들도 미사에 참석하여 모든 의식에 복종했다. 대단히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비운과 죄책감으로 말미암아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진 사람들이 복음의 핵심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나는 베를린 홍등가 타우엔친슈트라세가 대단히 비옥한 사역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나에게는 기도하는 살인자, 기도하는 매춘부를 상상하는 것이 허영심 강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다. 허영심만큼 기도와 사이가 나쁜 것도 없을 것이다.”

바르셀로나는 주민 모두가 즐겁고 이상하리만큼 활기가 넘치는 도시였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필수요소는 ‘오락’이었으며, 지적인 토론모임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본회퍼는 주로 어린이 예배를 이끌었으며, 나머지 시간에는 도이체 힐프스페어라인이라는 독일 자선회 사무실에 나갔다.

독일 명망가 집안 출신이었던 본회퍼에서 여기서 주목한 것은 그 사회에서 구석진 곳으로 배제된 사람들이었다. 유랑자들, 쫓기는 범법자들, 수많은 외인부대 병사들, 서커스단에서 도망쳐 나온 사자 조련사들, 버라이어티쇼 무대에서 춤추는 독일 여인들, 정치인을 암살하고 쫓기는 독일인들도 있었다. 본회퍼는 난생처음 만난 가난한 이들과 부랑자들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고 곧바로 그들의 처지를 자신의 신학과 인생의 주제로 삼았다. 뢰슬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들의 환경이 어떠하건 간에 날마다 사람들을 알아가고 있네. 가끔은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통해 그들을 들여다보기도 하지. 다음 한 가지가 나를 계속 감동시킨다네. 이곳에서 나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만나고 있어. 그리스도교 세계의 가면무도회에서 멀리 벗어나 만나는 거지. 울분을 지닌 사람들, 범죄자 유형의 사람들, 천한 사람들, 목표도 보잘것없고 급료도 보잘것없고 죄도 적게 짓는 사람들. 그들 모두 그리스도교 세계에도 이 세상에도 집이 없다고 느끼지만, 누군가 상냥하게 말을 건네면 곧바로 눈 녹듯 풀리는 사람들이야. 진짜 사람들이지. 그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은 진노보다는 은총 아래 더 많이 자리하고, 그리스도교 세계는 은총보다 진노 아래 더 많이 자리하고 있다’고 느껴.”

1928년에 디트리히 본회퍼는 바르셀로나를 떠나기 앞서 세 차례 강연을 맡았다. 그중 12월 11일에 행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기독교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강연은 대다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정작 그리스도는 추방되었다는 도발적인 발언을 하였다. “우리는 그분에게 신전을 지어드리면서도 생활은 자기 집에서 한다.” 주일 오전에만 존재하는 신앙을 비판한 것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종교는 빵을 먹고 나서 입에 넣는 한 입 거리 진미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어엿한 빵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이해하고 인정할 것”이라 했다.

본회퍼, 동료에게서 배우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본회퍼는 1929년 교수자격취득 논문 <행위와 존재>를 제출하고 강사 자격을 얻었다. 그 후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교에서 잠시 지내게 되는데, 그곳에서 배울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유니언신학교는 근본주의 신학과 논쟁을 벌이는 자유주의자들의 천국이었다. 특히 해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은 ‘진보의 이름으로’ 존 록펠러가 지은 리버사이드처치(Riverside Church) 설교단을 장악하고 ‘마리아의 동정성’ 등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적 고백들을 우롱하였다. 오히려 뉴욕에서 본회퍼의 마음을 끌어당긴 것은 흑인교회였다.

동료였던 앨버트 프랭클린 프랭크 피셔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는데, 리버사이드처치에 염증을 느끼던 본회퍼를 흑인거주지역인 할렘에 있는 아비시니안 침례교회로 초대했다. 본회퍼는 흑인교회에서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들었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설교자는 노예 부부의 아들이었던 애덤 클레이턴 파월(Adam Clayton Powell)이었다.

파월은 인종차별주의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웠다. 그 후 뉴욕에 머무는 동안 본회퍼는 매주 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주일학교 소년부를 맡아 가르쳤다. 여기서 그가 배운 것은 참된 신앙은 고난의 역사를 간직한 교회 안에 자리한다는 것이다. 특히 본회퍼의 넋을 사로잡은 것은 흑인영가였다. 예배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고 있던 본회퍼에게 흑인영가는 놀라운 경험이었고, 그 음반을 구하러 다니는 게 일과의 한 부분이었다.

한편 이때까지만 해도 본회퍼는 반전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유니언에서 만난 프랑스인 동료 장 라세르(Jean Lasserre)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믿습니까? 아니면 프랑스의 영원한 선교를 믿습니까?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민족주의자일 수는 없습니다.”라고 거듭 말했다. 평화주의에 관한 라세르의 생각을 뼈저리게 받아들인 계기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원작소설로 만든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였다. 당시 독일인들은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달콤하고 고귀한 일이다”라는 호라티우스의 시구처럼, 전쟁예찬론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교육을 받고 떼를 지어 죽음의 참호로 나아갔다. 그리고 대부분이 죽거나 공포에 질려 실성하고 말았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1930,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
서부전선 이상 없다, 1930,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

전쟁을 고발하는 이 영화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철천지원수가 되어 싸우고 있다. 젊은 독일 병사가 프랑스 병사를 찔러 죽인다. 참호 속에서 죽은 이의 시신 옆에서 신음하던 독일 병사는 자기가 저지른 참상을 지켜보면서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을 쓰다듬고 위로한다. 결국 프랑스 병사가 죽자 독일 병사는 시신의 발치에 누워 용서를 빈다. 그리고 고인의 지갑에서 이름을 알게 되고, 그의 아내와 딸이 함께 찍은 사진을 들여다본다.

본회퍼는 라세르와 함께 이 영화를 보고서 폭력과 고통이 주는 슬픔을 느끼고, 그날 오후부터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라세르는 산상수훈을 언급하고, 그때부터 산상수훈은 본회퍼의 인생과 신학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본회퍼가 <나를 따르라>를 쓰게 된 계기도 산상수훈이었다. 한편 본회퍼는 라세르를 통해 에큐메니칼협의회에 투신하고, 이 협의회를 통해 히틀러와 나치에 맞서 싸우는 저항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성경 안에서 길을 찾다

1931년 11월에 목사 안수를 받은 본회퍼는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 교목으로 파송되었다. 견신례 반을 맡았던 본회퍼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지침은 성경이었다. 그는 자형인 뤼디거 슐라이허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경만이 우리가 지닌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고 생각한다”며, 성경을 연서(戀書)처럼 읽으라고 권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말을 조각조각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며칠 동안 마음속에 담아두고 곱씹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말이 우리가 사랑하는 이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속에 곰곰이 되새길 때’ 그 말이 발언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듯이 성경 말씀도 그러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우리의 질문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듯이 우리가 성경의 말씀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 때에만 우리는 성경을 반기게 될 것입니다.”

본회퍼는 성경을 아침에도 읽고 저녁에도 읽었으며, 낮 시간에도 종종 읽었다고 한다. 한 주간을 위해 뽑은 구절을 날마다 숙고하고, 그 구절에 푹 잠겨 그것이 뭐라고 말하는 지 들으려고 애썼다. 그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올바르게 살 수 없다”고 했다.

 

[참고]

<디트리히 본회퍼>, 에릭 메택시스, 포이에마, 2018
<나를 따르라>, 본회퍼, 김순현 번역, 복있는 사람들, 2016 

*이 글의 축약본은 <가톨릭평론> 2020년 7-8월호에 실렸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