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 제국교회에 저항하는 고백교회
상태바
본회퍼, 제국교회에 저항하는 고백교회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07.20 17: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본회퍼, 고백에서 저항으로-3

히틀러와 반유대주의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독일 수상이 되면서 제3제국이 출범하였다. 이틀 뒤인 2월 1일 스물여섯 살의 한 신학자가 포츠담슈트라세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연설을 했다. 본회퍼다. 그는 <젊은 세대 안에서 일어나는 지도자 개념의 변화>라는 제목으로 “신을 자처하는 총통과 직책은 하느님과 그분 앞에 홀로 서 있는 개인을 조롱하고 타락시키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나치정권은 ‘직업 공무원 계급 재건 법’으로 알려진 ‘아리안 조항’을 통해 공무원은 아리안족이어야 한다며 유대계 혈통을 공직에서 쫓아냈다. 독일교회 역시 본질적으로 국가교회이므로, 본회퍼의 친구 프란츠 힐데브란트처럼 유대계 혈통의 목사들도 배제될 판이었다.

독일 개신교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몇몇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가 공산주의와 무신론에 맞서 싸우는 나치와 화해하고, 나치의 인종차별법과 총통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자신들이 교회와 국가를 결혼시켜 교회와 독일을 베르사이유 조약 이전 상태로 복귀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무신론적이고 타락한 볼셰비즘 세력을 격퇴시킬 강력한 제국교회를 원했고, 이를 ‘적극적 그리스도교’라 불렀다. 그러나 본회퍼는 이미 가톨릭을 통해 독일 루터교회 너머에 있는 보편적 교회를 경험했다.

1933년 3월에 발표한 <유대인 문제에 직면한 교회>에서, 본회퍼는 교회가 국가에 대처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국가의 행위에 대한 적법성을 따져 묻고 항의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국가의 행위에 희생당한 이들을 돕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바퀴에 짓밟힌 희생자들을 싸매어줄 뿐 아니라 바퀴 자체를 저지하는 것”이다. 바퀴살에 막대기를 끼워 넣어 자동차를 멈추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론을 내리면서, 본회퍼는 유대인도 교회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교회는 유대인과 독일인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드는 곳에 있다. 바로 거기에서만 교회는 여전히 교회인지 아닌지가 판명된다”고 덧붙였다.

한편 히틀러는 그리스도교를 온순함과 무기력을 설교하는 종교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싫어했다. 히틀러는 바이마르에 있는 니체 박물관을 여러 차례 방문했는데, 니체가 ‘권력의지’를 두고 한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무자비를 미덕으로 여기던 히틀러에게 온유함을 옹호하는 그리스도교는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는 니체가 자신의 출현과 집권을 예언했다고 믿었다. 나치 친위대 수장인 하인리히 힘러(Heinrich Luitpold Himmler)도 그리스도교를 경멸했다. 그에게는 나치 친위대 자체가 종교였고, 친위대 대원은 성직 지망자나 다름없었다. 나치 친위대의 수많은 의식은 사실상 밀교예식과 유사했다.

독일 그리스도인
독일 그리스도인
독일 그리스도인 깃발
독일 그리스도인 깃발

독일그리스도인과 고백교회

나치와 개신교를 매끈하게 연결하고 싶어하던 이들은 자신들을 ‘독일 그리스도인(Glaubensbewegung Deutsch Christen)’이라고 불렀다.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상극이고, 예수는 제일가는 반유대주의자이고, 십자가는 유대인에 대한 전쟁의 상징이라고 선포했다. 그들은 먼저 구약성경을 없애기로 하였고, 1939년에는 ‘독일교회에 남아있는 유대교의 영향을 조사하고 제거하기 위한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들은 찬송가에서 여호와, 할렐루야, 호산나 같은 유대 단어를 제거하고, 예루살렘을 ‘천상의 거처’로, 레바논의 향백나무를 '독일의 전나무'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세례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민족공동체 안에, 총통의 세계관 속에 잠기는 것이라고도 했다. 이들은 빈약한 신학을 통해 온갖 이단사설을 배출하는 출구였다.

1933년 교계에서 존경받던 보델슈빙(Bodelschwingh)이 제국교회의 감독으로 선출되었지만 독일 그리스도인과 나치의 간섭으로 물러나고, 결국 그들이 지지하던 루트비히 뮐러(Ludwig Müller)가 제국교회 감독이 되었다. 여기에 반대하던 본회퍼는 헤르만 자세와 더불어 독일 그리스도인의 신학을 반박하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한편 목사긴급동맹이 결성되어 “아리안 조항을 단호히 거부하고, 새로운 법이나 폭력으로 학대받는 이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서명자는 6,000명으로 늘어나 제국교회에서 독립적인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를 준비했다. 이들은 1934년 바르멘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칼 바르트가 기초한 ‘바르멘 선언’을 채택하고 고백교회의 출범을 알렸다. 선언문은 교회가 국가권력 아래 있지 않다고 밝히며, 뮐러가 이끄는 관제교회를 배격했다. 그리고 에큐메니칼 청년회합인 파뇌 대회에서 본회퍼는 전쟁을 부추기는 나치에 대항해 평화연설을 했다.

“안전한 길에는 평화에 이르는 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화에 이르려면 위험을 무릅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그 자체로 엄청난 모험이기에 절대로 안전할 수 없습니다. 평화는 안전의 반대입니다. 안전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를 지키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계명에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전을 바라지 않으면서 믿음과 복종으로 민족의 운명을 전능하신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민족의 운명을 조작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무기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함께하셔야 이길 수 있습니다. 길이 십자가로 이어질 때에만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칭스트 농장에서, 본회퍼
칭스트 농장에서, 본회퍼

새로운 신앙공동체 실험 : 칭스트와 핑켄발데 신학원

1934년 고백교회 지도자들은 신학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본회퍼에게 원장직을 맡겼다. 당시 본회퍼는 간디를 만나고 싶어 했다. 간디가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산상수훈의 가르침대로 생활하고 있는 공동체(아쉬람)에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본회퍼가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인도에 다녀오는 것을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의 제국교회 전체보다는 그곳의 ‘이교’ 속에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더 많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정신은 아시아에서 온 것이거든요.”

본회퍼는 칭스트에서 수도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신학원을 시작하였다. 목사 후보생들이 신학생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도록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 루터교 전통에서는 낯선 경험이었고, 자칫 가톨릭을 연상시킨다는 오해와 비난을 살 수 있었지만 본회퍼는 이를 무시했다. 본회퍼에게 중요한 것은 교리가 아니라 삶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을 ‘원장’이라고 부르지 말고 ‘형제’라 불러달라고 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징집에 관한 법령이 발효되면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군에 입대하고 말았다. 그해 다시 핑켄발데에서 다시 문을 연 신학원에 본회퍼는 자신이 소장했던 신학서적 전부를 기증했다. 축음기와 흑인영가 등 음반도 기증했다. 그들은 정오 무렵이면 한 자리에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나중에 본회퍼의 영혼의 벗(soulmate)이 된 베트게는 아담 굼펠츠하이머의 <아뉴스 데이>(Agnus Dei)를 가르쳤다.

신학원에서 아침식사 전에 식탁에 둘러앉아 45분간 예배를 드리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예배를 드렸다. 본회퍼는 학생들에게 예배 전에는 한 마디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는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예배는 시편 영창으로 시작해서 성경을 읽어나갔다. 다들 매일 30분간 성경의 같은 구절을 한 주 내내 묵상했다. 이 당시 본회퍼가 칼 바르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다.

“어느 한가한 저녁에 당신은 신학생들에게 진지하게 말했지요. 가끔은 모든 강의를 내려놓고 노년의 프리드리히 톨루크처럼 누군가를 깜짝 방문하여 ‘당신의 영혼은 어떻습니까?’하는 물음을 던지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 저녁은 제가 함께한 최고의 저녁이었습니다. ... 아침저녁으로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는 일이 지배하는 삶, 정해진 기도 시간이 지배하는 삶에서만 신학 작업과 실제적인 목회 협력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본회퍼는 설교 역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설교는 하느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자리였다. 설교는 지적 훈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상 밖에서 세상 안으로 들어오시는 자리였다.”고 본회퍼는 말한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돌아오는 성찬예식 전에는 상대를 정해 고해를 하도록 했다. 본회퍼 역시 에버하르트 베트게(Eberhard Bethge)를 친구로 두고 고해를 했다. 본회퍼는 고해가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해주리라 믿었다.

 

마르틴 뮐러 목사
마르틴 니뮐러 목사

뉘른베르크 법령과 예언직

1935년 9월 15일 뉘른베르크 법령이 공표되면서 유대인들은 독일 혈통과 결혼할 수 없으며, 혼외정사도 금지되는 등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본회퍼는 고백교회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에만 반응하는데 분통을 터뜨렸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를 위한 존재’라면서 교회 역시 타자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교회는 교회 바깥에 있는 타자를 섬기고, 그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본회퍼는 “유대인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만이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를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다른 목사들은 세상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견해의 경계선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히틀러와 협상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1936년에 고백교회의 행정당국이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솔직히 비판하는 문서를 준비하면서 본회퍼는 다시 희망을 품었다. 항의서는 독일 국민의 탈(脫)그리스도교화가 정부의 공식 정책인지, 적극적 그리스도교가 나치당을 의미하는 것인지, 묻고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미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반유대주의가 강요된다면 저항할 수밖에 없다고 천명했다. 힐데브란트 목사가 작성에 관여하고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목사가 서명한 이 항의서가 수상관저에 전달되었으나 베를린 국제올림픽을 앞둔 히틀러는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항의서 내용이 <모닝포스트>와 스위스 신문에 올라오면서 파문이 일었다. 문서를 언론에 유출한 본회퍼의 제자 베르너 코흐와 에른스트 틸리히, 고백교회 변호사 프리드리히 바이슬러 박사가 게슈타포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고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히틀러는 올림픽이 끝난 1937년부터 고백교회를 혹독하게 대했다. 800명이 넘는 목사와 평신도들이 투옥되고, 고백교회 지도자 마르틴 니묄러는 다하우 집단수용소로 끌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이 되어서야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때 니묄러 목사가 이런 글을 남겼다.

“처음에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할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런 다음 그들이 노조원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할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런 다음 그들이 유대인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할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러고 나서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다.
남은 이들 중에는 나를 변호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해에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를 출판했지만, 나치는 핑켄발데의 신학교를 폐쇄하였다.

 

[참고]

<디트리히 본회퍼>, 에릭 메택시스, 포이에마, 2018
<나를 따르라>, 본회퍼, 김순현 번역, 복있는 사람들, 2016 

*이 글의 축약본은 <가톨릭평론> 2020년 7-8월호에 실렸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