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더불어 꿈꾸어 보는 예언자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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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더불어 꿈꾸어 보는 예언자적 상상력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19.08.18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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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것을 ‘혁명’이라 했다. 광화문을 가득 채운 촛불로 일구어 낸 혁명. 그러나 혁명이란 본래 ‘미완성’인가, 동학혁명도 4.19혁명도 미완성이었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 모든 게 바뀔 것이라 믿었던 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확인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세월호였다. 세월호 참사를 슬퍼하던 시민들의 눈물겨운 연대성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알지 못한다. 세월호는 인양되어 기념될 뿐, 진실은 여전히 바다 한가운데 수장되어 있다.

전교조는 여전히 법외노조로 남아 있고, 사법농단 세력은 의기양양하며, 삼성 이재용은 건재한데, 삼성 해직 노동자 김용희는 서울 강남역 네거리 폐쇄회로티브이 철탑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죽을 자리로 내몰리고, 재벌들은 국가의 비호 속에서 안락하다. 정부 여당은 다 잘하는데, 야당이 문제라고 말한다면 이건 촛불정부의 비겁한 직무유기다. 윤석열이 검찰총장이 되고, 조국이 법무부 장관이 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에겐 희망이 필요하다, 동학꾼들이 꾸었던 꿈이 의병이 되고 민족해방운동으로 계승되었던 것처럼.

 

존 니프시는 <신성한 목소리가 부른다>(분도, 2019)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언자적 상상력을 길러서 하느님의 꿈을 이루는 길을 찾으라고 부름받고 있다고 했다. 마커스 보그는 <우리가 결코 알지 못했던 하느님>에서 성경을 “하느님의 꿈에 대한 이야기”라 했다. 하느님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세상”, 사람들이 “의롭게 행동하고, 부드럽게 사랑하고, 겸손하게 걷는” 세상을 꿈꾼다고 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꿈은 “인간이 서로 상처를 입히거나 파괴하거나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는 정의와 평화의 세계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비전”이다. 히브리 성경은 이 비전을 “샬롬”(shalom)이라 불렀다.

“하느님의 꿈인 샬롬은 ‘평화’로 번역되지만, 샬롬은 전쟁 없는 상태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포괄적 차원의 안녕(well-being)을 의미한다. 샬롬은 건강, 번영, 안전과 같은 긍정적인 것의 존재뿐 아니라 억압, 불안,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것에서의 해방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샬롬에는 사회적 비전이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안녕을 누리는 세계의 꿈이다.”

하느님의 꿈은 우선 예수님에게서 타올랐다. 이 꿈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눈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풀어 보내”(루카 4,18)는 예수의 사명에서 드러난다. 이런 세상을 복음서에서는 ‘하느님 나라’라고 부른다. 이 나라는 신비에 싸인 ‘저 세상’의 차원도 있겠지만, 예수님에게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예언자적 상상력>이라는 책을 쓴 월터 브루거만은 “언젠가 좋은 세상이 오겠지” 하고 막연한 공상만 하지 말고 “현실을 상상하라”고 말한다. 지금여기에서 발생하는 슬픔과 분노를 일으키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상황”을 분명히 보고, 분명히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예언자는 지레 절망하고 이미 무감각해진 사람들 앞에서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느끼도록” 돕기 위해 하느님에게서 부름 받은 자들이다.

 

존 니프시는 <신성한 목소리가 부른다>에서 인디언 추장 검은 고라니의 회상을 들려준다. 그는 1890년 겨울에 운디드 니 강가에서 미군 기병대가 비무장한 수족 수백 명을 학살한 사건을 가슴 아프게 떠올린다.

“모든 것은 끝났다. 그때는 얼마나 죽었는지 몰랐다. 이제는 늙은이가 되어 인생의 높은 언덕에서 돌아보면, 내가 젊었을 때 내 두 눈으로 보았던 것처럼 명료하게, 협곡을 따라 여기저기 쌓여 있는 학살당한 여자들과 아이들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언가가 피로 물든 진흙 속에 죽어 있는 것을, 눈보라 속에 묻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의 꿈이 죽어 있다. 아름다운 꿈이 죽어 있다.”

1989년 11월 16일 엘살바도르 센트럴 아메리카 대학에서 군부에 의해 예수회 신부였던 에야쿠리아(Ignacio Ellacuría)가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다행히 이 자리에 없어서 목숨을 건졌던 같은 예수회원 혼 소브리노 신부는 이렇게 썼다.

“엘살바도르에서 우리가 깨달은 것은 이 세계는 처형자의 손에 죽어 가는 수많은 이들의 거대한 십자가라는 것이었다. 에야쿠리야 신부는 그들을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이라 불렀다. 그것은 우리 세계의 가장 중요한 현실이다. 양적으로 인류의 삼분의 이가 질적으로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십자가와 죽음의 현실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죽이는 엄청난 가난을 정확히 바라보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불의의 구조에 의해 느리게 죽임 당하고, 그들의 운명을 바꾸려고 할 때는 빠르게 폭력적으로 죽임을 당한다.”

이러한 예언적 발언은 우리의 시선을 십자가 현실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가로 막는다. 이때 예언자들은 “그래서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하고 회피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무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하며 희망을 선택하게 만드는 이들이다.

복음서의 부자청년 이야기(마르 10,17-27)에서,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묻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청년은 울상이 되어 떠나갔다. 덧붙여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였으니, 제자들마저 이 충격적인 처방에 낙담하며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예수님 요구가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태연히 “하느님께 불가능은 없다”며, 넌지시 너희도 해보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꿈꾸셨고, 예수님이 갈망했던 세상을 지금여기에서 다시 꿈꾸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장소는 우리의 깊은 기쁨과 세상의 깊은 갈망이 만나는 곳”이라고 프레드릭 비크너가 말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우리가 예언자적 상상력을 잃지 않고,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이미 우리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와 있다고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혁명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미완성일 뿐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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