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적 없는 가톨릭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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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적 없는 가톨릭일꾼
  • 로살리 뤼글
  • 승인 2016.05.31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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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살리 뤼글의 <도로시 데이>-4

"가톨릭일꾼 그리고 도로시와 함께 있는 것은 항상 흥분으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지루한 적이 결코 없었다.” - 죠오 자렐라

도로시는 향수와 하얀 손수건을 좋아했다 

아그네스 버드 맥코맥은 1938년부터 1942년까지 도로시 데이의 비서로 있었는데, 초기 일꾼시절에 대해 생생한 기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도로시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마지막 방문을 했는데, “그 아름다운 시절”을 즐겁게 회상하였다:

나는 도로시가 피터 같은 사람을 필사적으로 찾은 것처럼, 나도 도로시 같은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1938년, 매섭게 추운 겨울날, 나는 아무 곳에도 낄 수 없는 사람 같았다. 아마 그때 일자리를 찾고 있었을 것 같은데, 그냥 맨하탄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 눈에 비치는 사람들은 문 앞에서 추위에 와들와들 떨며 서 있는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들뿐이었다. 대부분 남자들이고, 어깨는 구부정하고 거칠고 추위로 뻘개진 손들을 움켜쥔 모습들이었다. 신앙이 나에게서 급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미친 듯이 기도하고 매일미사에 가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6월이 되었다. 도로시가 우리 본당에 와서 강연했고, 나는 들으러 갔다. 그의 말은 “내 마음 속에 즐거움을 한 방 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애덕을 실천하자고 말했고 나는 완전히 전적으로 반해버렸다.

난 즉시 그에게 가톨릭일꾼에 가도 되겠냐고 물었는데, 도로시는 안된다고 말했다. 도로시는 젊은 여성들에게 항상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자기가 젊은 여성들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들은 그곳에 나타났다. 내가 일꾼에 갔던 첫날 밤, 도로시는 없었고 피터가 있었다. 나는 재미있는 저녁시간을 보냈다. 피터는 너무나 똑똑하고 많은 말을 했지만, 난 그의 말을 반 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피터는 다시 오지 말라고, 할 일이 없다고 말했다. 다행하게도 난 스탠리 비쉬네브스키를 만났는데, 그는 할일이 많으니 또 오라고 했다.

 뉴욕 매리하우스 사무실 앞. ⓒ한상봉

그러나 나는 그 해 겨울이 될 때까지 도로시 데이와 전혀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로시는 나의 타자 실력과 속기 때문에 나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그의 비서가 되었고 아름다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도로시는 너무나 매력적인 사람이었으며 유머 감각이 뛰어났다. 그는 모든 것에서 새로운 모험들을 발견했으며, 더럽고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도시에서 색조와 아름다움과 따스함을 보여 주었다.

도로시는 가난 속에 살면서도 향수와 수놓은 하얀 손수건들을 좋아했고 항상 지니고 다녔다. 사람들은 그가 이런 것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즐겨 선물했다. 물론 도로시는 받은 것들을 다시 사람들에게 돌렸고, 그러면 그들은 더 주었다.

도로시는 항상 가진 것들을 남에게 주었다. 방공호에 피신하는 훈련을 거부했다고 두 번째로 체포되었을 때, 나는 여자구치소로 그를 방문했다. 아무것도 나에게 줄 것이 없자 도로시는 손수건을 내놓았다. 내가 사양하자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곳에는 화장지가 충분하고 또 코를 풀기엔 휴지가 좋다고 말했다. 그의 웃음… 그건 소녀의 웃음이었다. 나이가 80이 되어도 그는 그렇게 웃었다! 먼저 눈이 반짝이고 나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모습이었다.

도로시는 당신이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때 매우 고집을 부리고 단호해지며 심술궂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혀는 매우 날카로울 수 있고 잔소리를 해대고, 당신의 약한 부분이라 생각되는 곳을 집중 공략하며 몰아칠 수도 있었다. 그는 그렇게 분명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 우리 모두는 그의 승인을 얻고자 했다.

"나를 성인으로 만들지 말라"

초기 일꾼운동에 합류했던 또 다른 사람들 중에 죠오 자렐라가 있었다. 그와 그의 아내 매리 앨리스는 가톨릭일꾼운동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뉴욕에서 만나 일꾼운동에서 결혼했고, 인디아나의 텔시로 이사 갔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한 가구공장의 노동자들을 조직하기도 했다. 도로시는 그들의 집을 자주 방문했고 그들의 네 자녀 중 한 명의 대모가 되었다.

나는 그다지 열심한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알다시피 나는 전형적인 이태리 가족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고 견진성사 후 교회에서 혼배했으나, 그것이 전부이다. 내 친구들은 사회주의자들이고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나는 우리교회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나에게 <가톨릭일꾼> 신문을 건네주었다.

그 후 1935년 5월 1일, 난 일을 중도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아마 배가 아팠던 것 같다). 갑자기 나는 14번가에서 차를 내려 노동절 행사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난 지금도 모른다. 다만 매우 운 좋은 결정이었다. 유니온 광장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가톨릭일꾼> 신문을 배포하고 있었다. 난 도울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작은 벌레가 나를 물었고, 나는 사로잡히고 말았다. 가톨릭일꾼과 도로시와 함께 있다는 것은 나를 항상 흥분시키는 일이었다. 항상, 항상 흥분된다. 한 번도 싫증나는 때가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나는 도로시를 만났는데, 일꾼에 합류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 여자는 늙은 사람이잖아! 얼마나 더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웃음). 난 너무나 어렸다. … 너무 젊었다. 난 그를 처음부터 우러러 보았다.

우리는 일꾼운동 초기에 도로시를 알게 되어 매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성숙해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와 함께 우리도 성숙해질 수 있었다. 도로시가 자신에게 중요한 일을 우리와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나는 비록 한계가 많았지만, 데이 여사가 이해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항상 화가 났다. 당신도 알다시피, 데이 여사는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았다.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고보고. … 그러나 그분에 대해 하는 얘기를 듣고 기사를 읽을 때 매우 마음이 아팠다. 그때에 우리들은 매우 적대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었다. 특히 우리 같은 그룹들은 더 힘들었다. 교회는 보수성향이 강했고 우리는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공산주의자들로 여겨졌다. 우리는 아무 곳에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데이 여사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신은 그를 누구와 비교할 수 없고 그 사실이 어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항상 그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나를 성인으로 만들지 말라. 나는 그렇게 쉽사리 내팽겨지고 싶지 않다.” 나의 개인 의견으로, 그가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시성이나 성인들에게 반감이 있어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로시는 성인들을 칭송했다. 그는 항상 성인들의 말을 인용하고 상본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다만 그 당시 사람들이 성인을 무관심하게 대했기 때문에 그런 식의 성인이 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고 여겨진다. 도로시는 성인들을 너무나 존경했으며, 그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항상 말했다. 나는 도로시로부터 진짜 성인들에 대해 배웠다.

당신이 데이 여사의 영향을 진정으로 받았다면, 결코 그것을 떨쳐버릴 수 없다. 당신은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상황에 대해 무언가 하지 않으면 복잡한 죄책감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가 발생하면 입장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어려운 것이다. 그 입장이란 보통 소수의 입장이 되고 친구들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드러나게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 당신이 옳게 행동하면, 당신은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또한 그들의 존경을 얻게 된다.

나는 우리가 도로시에게 배우는 가장 큰 것이 개인적인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책임감과 영성이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데이 여사가 사회문제에만 몰두했다고 여기지만, 그는 영적으로 깊은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사회문제에 대하여 힘이 있었다. 초기에 우리들은 너무나 괴롭힘을 당했고 학대를 받았다.

도로시는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독주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이룬 것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돈을 얻었고 사람들을 일하게 만들었고 사상을 펼쳤다. 나의 행동이 수위에 미치지 못하면 서슴지 않고 꾸짖었다. 그러나 그가 올곧고 개방적이므로 어디에 서야 할 지 당신은 알게 된다. 그는 판단하는데 있어 결코 잔인한 적이 없었다.

나는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에게서 받은 영향에 대해 너무나 감사한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말할 것이 있다. 가톨릭일꾼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버릇이 없어졌다. 가톨릭일꾼에서 최고를 보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최고 그리고 가장 흥분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항상 흥분되는 삶이었다. 가톨릭일꾼에 온 이후로 나의 삶에서 지루한 순간은 결코 없었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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