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길에 집을 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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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길에 집을 두다
  • 로살리 뤼글
  • 승인 2016.07.05 1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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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살리 뤼글의 <도로시 데이>-8

"그는 어딜 가든지 집처럼 포근함을 느꼈다." -타말 헤네시

스탠리는 이런 말을 했다: “도로시는 버스 속에 살고 있다. 그는 가톨릭일꾼을 창설하지만, 나머지 우리들이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도로시는 자주 길 위에 있었고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하여, 일꾼의 기금을 모으기 위하여, 친구들을 만나고 휴식을 얻기 위하여, 전국에 있는 환대의 집들을 격려하고 양성하기 위하여 늘 여행했다. 또한 단순하게 모험을 즐기고 우정을 만끽하고 여행할 때 얻게 되는 역설적인 고독을 좋아했기 때문에 움직였다.

도로시는 항상 공동체들 중의 하나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여행 중에 있을 때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은 지도력을 훈련할 기회를 얻었다. 그래서 로저 오닐은 아마도 도로시가 늘 거의 혼란의 상태에 있는 뉴욕 공동체에 있을 때 보다 여행할 때에 성취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 그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고무했다. 일꾼 집을 시작하게 하고 좋은 결과를 얻기도 했다. 그는 어떤 창조감을 느꼈을 것이다. 뉴욕에 있을 때 환대의 집은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로 가득찼다.

도로시의 일정은 매우 바쁘고 늘 꽉 차 있었다. 젊었을 때에도 여행과 강의 일정들은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는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마지 휴는 이렇게 회상한다:

❧ 도로시는 너무나 소진되어 보기에도 즉시 쉬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잘 회복하는 몸을 갖고 있다. 24시간 침대에서 쉬면 다시 일어나 삶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잦은 여행은 전국에서 새로 태어난 환대의 집들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로체스터 가톨릭일꾼의 창립자 매리 화렌은 도로시가 그들의 공동체에 와서 머물렀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 도착하면 도로시는 정식으로 강연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성실한 모습과 인자한 태도는 놀라운 확신을 준다. 벽장속의 두 번째 외투는 바깥의 가난한 이들 것이다 등등. 도로시는 질문시간에는 매우 직접적일 수 있고 날카로운 면도날 같은 대답들을 한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으려는 그의 모습은 대답이 직접적인 것만큼이나 강력한 영향을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한 이들을 가난하게,
가난한 이들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1950년대에 테네시를 방문했던 이야기는 도로시가 적대적인 군중들을 어떻게 단호한 태도로 다루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멤피스에 여러 인종들이 결합되어 있는 일꾼 집, 「축복의 마르틴 집」에 가서 학생들, 신부들, 형제들과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섞인 꽤 큰 청중에게 말했다. 헬렌 캘드웰은 「눈물을 흘리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그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일치에 대하여 말했다. 또한 서로 간에 의무에 대해서도… 그는 부자들의 의무에 대해서도, 우리 주님의 강력한 다음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앙화로다… 당신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그는 피터 모린의 말도 인용하면서, 우리는 살아 있을 때 주님의 이름으로 이웃에게 준 것만을 갖고 죽게 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갚은 관심을 표현했고 점점 더 진지해지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어떤 이들은 그의 말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꽉 막혀서 죽은 듯이 그대로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얼굴이 붉어지고 화가 난 모습이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도로시가 말을 끝낼 때까지 참느라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흑인들은 이런 말이 백인여성에게서 나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놀랬다. 그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희망이 보였다… 한 순간 그들은 우리의 작은 세계로부터 도로시에 의해 들어올려졌다.

강연이 끝나고 그가 자리에 앉자, 질문들이 시작되었다. 화가 가득하고 뜨거운 질문들이었다.

“가난과 더러움, 쥐들과 바퀴벌레들이 뭐 특별히 거룩한 점이 있습니까? 하느님은 어떤 사람이 그의 가족의 필요와 원하는 것들을 마련하기 위하여 일하고 돈을 저축하기 때문에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부자가 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입니까? 애덕은 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습니까?”(도로시가 대답했다) “먼지와 쥐와 바퀴벌레는 전혀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방식에 매우 거룩하지 않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자들의 안전은 애덕, 자선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한 이들을 가난하게, 가난한 이들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선은 집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형제들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집에 대하여 우리의 아이들에 대하여 너무 말을 많이 합니다.”

“가톨릭일꾼은 스스로를 돕지 않는 사람들을 먹이고 있을 곳을 줌으로써 게으름과 무기력을 더 조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도로시는 이 질문을 부인했다. “아닙니다. 피터 모린은 사람들이 선해지기가 더 쉬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들은 선해지기 위하여 행복해질 필요가 있고, 행복해지기 위하여 선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적 사회질서를 만들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적 사회질서가 필요합니다. 또다시 역설입니다. 살기 위하여 죽는 역설 같은 것 말입니다. 아무도 그런 역설이 단순한 문제인 척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간 속에서 그리고 영원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긴 안목을 갖고 살지만 현재 순간에 가장 집중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유지하기 위한 일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서로를 돕고,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없을 때 서로의 짐을 져 줄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캘리포니아는 도로시를 자주 불렀다. 크리스와 죠앤 몬테사노가 샌프란치스꼬에 마틴 드 포레스 가톨릭일꾼 집을 시작했고 후에 시에라산 고원지대에 가톨릭일꾼 양목장도 시작했다. 크리스는 이렇게 회상한다:

❧ 도로시는 마틴집이 처음 시작되었들 때 우리에게 왔다. 그는 강연을 했고 우리는 기부금을 모았다. 모두 오백달러였다.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어쨌건, 우리는 돈을 도로시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그는 말했다, “오,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니예요! 당신들은 이제 환대의 집을 시작했어요. 돈이 필요할 겁니다.”
“아닙니다, 도로시! 당신이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도로시가 돈을 받았다. 다음 날 어떤 사람이 방문하여 우리에게 현금 오백달러를 내놓았다. “주어라 그러면 그 만큼 받을 것이다.” 

마틴 집의 초기시절, 우리는 그런 정신으로 충만했다. 그냥 단출하게… 우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처음 달과 마지막 달의 집세밖에 없었다. 도로시는 그런 점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일꾼 집들의 초기 시절을 좋아했고 자주 방문했는데, 아마도 그 때가 특별한 은총의 시기라고 느꼈던 때문이고 그 사실을 함께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았다.

평화를 위한 로마여행..공의회 막바지에

도로시는 항상 가톨릭일꾼 집들을 키우고 서로 연대를 맺도록 도와주며 어려움들을 함께 풀어나가곤 했다. 톰 코넬이 그의 방문을 회상한다:

❧ 그는 자신만의 방식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일꾼집에 가면 일꾼들이 말한다. “아, 도로시, 오셔서 반가워요. 우린 큰 문제가 생겼어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로시는 이렇게 말한다, “우선 커피 한 잔을 듭시다.” 그러면 그들은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도로시는 추억을 되살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도로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에 사람들은 말한다, “그가 우리의 문제를 그렇게 풀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다음날 도로시는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간다. 그는 이야기들을 말해주고 사람들은 그 이야기 속에 그들이 원하고 들어야 할 것들을 듣는다. 때때로 도로시도 귀를 기울인다. 아마도 도로시는 어떤 의식없이 이런 기술을, 즉 귀를 기울여 경청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응답하는 기술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비직접적인 치유법이나 그와 비슷한 방법에 관한 책을 결코 읽은 적이 없었으나, 비폭력의 규칙들을 심화시켰다.

도로시는 자주 해외에 나갔는데, 로마를 처음에는 배, 그 다음에는 비행기로 두 번이나 방문했으며, 쿠바, 영국 아일랜드, 러시아, 호주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세계 전역을 돌아다녔다. 짐 더글라스는 도로시의 두 번째 로마 방문을 말한다:

❧ 도로시는 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될 즈음, 두 번째로 로마를 방문했다. 나도 그해 가을 주교들과 평화 주제에 관한 교섭을 계속하기 위하여 로마로 돌아가 있었다. 그 때는 공의회의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으며 마지막 토론 시간이었다. 도로시는 다른 여성들과 함께 단식하며 주교들에게 핵전쟁에 반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단식하고 있는 도로시를 몇 번 마주쳤고, 그의 단식은 주교들이 전쟁과 평화에 관한 타협이 담긴 선언으로부터 돌아서게 할 만큼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주교들은 실제로 모든 전쟁을 단죄하고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더 직접적인 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 접근할 때 두 가지 방법들이 있다. 하나는 주교들로 하여금 비폭력의 입장을 받아들이도록 외교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로시는 그런 일에 관여했다. 그는 그 문제에 전적으로 매달렸던 <가톨릭일꾼> 신문을 들고 다녔으며, 결국 참석한 모든 주교들에게 신문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평화에 관한 이런 모든 노력의 깊은 곳에는 영적인 결단의 요청이 있었다. 알다시피 공의회가 마지막으로 선포한 문헌 <사목헌장>은 무기경쟁과 기아를 연결시켰고, 반드시 그렇게 했어야 하는 문제였다. 단식에 관한 이야기를 썼을 때 도로시는 심각한 고통을 경험했다고 했다. 어쨌건 단식을 하면서 조그맣게 무기경쟁과 기아의 연결점을 경험했다고 느낀 것 같았다. 나는 도로시와 다른 여성들이 단식함으로써 교회가 단지 핵전쟁에 대한 언급에 그치지 않고, 복음에의 회귀로 문헌의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같은 한 무리의 사람들은 말로 하고, 도로시와 다른 여성들은 단식을 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들의 역할은 당시 매우 중요했다.

아일린 이건은 도로시를 동반했고 그가 단식하는 동안 주교들과 만났다.

❧ 도로시는 단식하는 동안 전에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고통, 뼈 속의 아픔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전 세계의 모든 가난한 이들과 단식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나의 단식선물은 단지 과부의 동전 한 닢에 불과했고, 나의 고통은 매일 배고픈 전 세계 사람들의 고통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날 공의회에서 평화문제가 거론 되었고 교종 바오로 6세가 유엔에서 연설했다. 그는 “더 이상 전쟁은 없어야 한다”와 “절대로 다시 전쟁은 없어야 한다”를 외쳤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다. 냉전 상태를 그냥 받아들이자는 쪽으로 기울었던 영국 주교들의 의견이 바뀐 것이다. 그것은 짐 더글라스와 고든 잔 덕분이었다.

그러는 동안 내내 도로시는 단식하고 기도했다. 마침내 표결에 들어갔다. 주교들은 무차별한 전쟁을 단죄하고,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 안을 지지했다. 주교들은 또한 무기경쟁비용이 가난한 이들을 배신하는 함정이라고 말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싸우고 있는 주제들이다.

반교회적이지 않은 사회주의, 쿠바

1962년 카스트로가 있는 쿠바로 갔던 여행은,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오해를 받았다. 그러나 연설을 들은 쿠바 가톨릭인들은 그의 메시지를 환영했다. 그의 개종에 호의적이었던 친구들 중 하나였던 레이첼 드 아라곤은 더 내적인 관점에서 이 경험을 표현한다:

❧ 쿠바 여행은 반교회적이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를 처음 보고, 교회와 국가의 문제들을 서로 적대감을 갖지 않고 해결해 갈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기회였다.

도로시는 쿠바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 한 보따리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쿠바여행에 대해 흥분했고 매우 행복해했다. 그에게는 보통 일들과 보통 사람들이 교회와 국가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이야기꺼리가 되었다. 그것은 가톨릭과 지방 자치주의에 대한 그의 비전을 … 또한 그 목적지에 다다르는 그의 길을 다시 확인해 준 방문이요 경험이었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렇게 썼다, “집을 잃어버리면 필연적으로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 도로시는 세상과 그 모든 다양함을 사랑했으며, 건강을 잃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여행을 다녔다. 1970년, 그는 아일린 이간과 호주로 가서 그곳에서부터 세계를 돌아다녔다. 아일린은 이렇게 회상했다:

❧ 한 호주 평화운동 그룹이 우리를 호주로 초대했으며 왕복세계 여행권을 주었다. 도로시는 여행의 이런저런 복잡함을 받아들였고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좋았다. 그러나 세계 여행에서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밖으로 나가 충분히 돌아다닐 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캘커타에서 홍수가 났을 때 나는 마더 데레사와 함께 홍수지역을 돌아보았다. 도로시는 불평하지 않았지만, 한 번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신들처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때 도로시는 마더 데레사를 처음 만났다. 떠날 때가 왔을 때 마더 데레사가 예수성심상이 달린 검은 십자가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그 수도회 수녀들이 사리에 달고 다녔던 십자가였다. 마더 데레사는 그 십자가를 도로시의 옷 왼편에 꽂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당신은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됐네요.”

척 메타이는 2002년 죽기 전까지 지역개발 프로그램에서 일했던 가톨릭일꾼 출신인데, 여행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도로시와 공통점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 도로시의 삶은 대부분 길에서 살았던 삶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삶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때때로 그는 미국 전역을 돌며 만났던 사람들, 장소들, 프로젝트들에 대하여 흥미롭고 깊은 영감을 주는 얘기들을 일꾼신문의 “순례 길에”라는 고정란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어떤 기사들은 아주 개인적인 느낌들인데, 여행할 때 느끼는 외로움과 두려움, 즐거움과 흥분 그리고 해방감 같은 것들이었다.

길 위의 삶이란 그것 자체가 소명이다. 그리고 도로시 처럼 여행을 많이 하게 될 때 그것은 방문이 아니라 삶 자체가 된다. 단순한 여행이라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도로시 처럼 많이 돌아다니게 되면, 당신은 보통 집 생활을 결코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가 자서전 제목을 「긴 외로움」이라고 부른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결정이었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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