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운동의 지도자와 추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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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운동의 지도자와 추종자들
  • 로살리 뤼글
  • 승인 2016.06.1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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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살리 뤼글의 <도로시 데이>-6
도로시 데이

“가톨릭일꾼 가족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은 없다.” (제임스 죠이스 신부, 예수회)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이 뉴욕에 창립했던 첫 번째 공동체와 도로시 데이의 관계는, 미국 전역의 다른 공동체들과 그가 맺었던 관계들과 현저하게 차이가 있었다. 뉴욕 공동체 안에서도, 도로시 데이의 지도력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바뀌었다. 그가 바뀌었기 때문이고,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지닌 차이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전혀 제재를 가할 수 없었던 문화 차원의 사건들 때문이었다.

도로시는 가톨릭일꾼을 이끌었던 50년 동안 몇 가지 다른 형태의 지도력을 시도했다. 이러한 형태들은 적어도 공동체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부분적으로 의존하는 지도력이었다. 많은 일꾼들이 도로시의 독단적인 지도력에 대해 말했다. 어떤 사람은, “남자들은 제안하고 도로시는 치워버린다.”고 말했고, 또 다른 사람은, “도로시는 자신이 우두머리 무정부주의자가 될 수 있다면, 무정부주의를 신뢰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지도력이 타고난 내적인 힘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에드 터너는 도로시가 “감정을 익살스럽게 표현하지 않았으며, 고함치지도 않고,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으며” 능숙한 솜씨로 단호하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자각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다고 말한다. 결코 일꾼훈련 프로그램을 시행해 본적이 없으며 누구든지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의존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방식이 “대부분의 경우 먹혀들었으나, 항상 효과적이진 않았다.”고 말한다.

에드 터너는 이어 말한다:

❧ 도로시는 능력 있는 행정가가 아니었다. 그는 선동가요, 저널리스트이고 운동에 영감을 불어넣는 사람이었다. 그는 뉴욕의 환대의 집과 부속 농장들을 운영했는데, 그것은 개인적으로 그의 책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그가 말하는 것이 최종적인 결정이었다. 그러나 전국 차원에서는 이런 방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은 그가 규칙을 정해서 모든 공동체들을 결속시키려고 했다. 특히, 평화주의에 관하여. 그러나 그는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가톨릭일꾼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그와 똑같이 해보라고 격려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의 모임에 가서 강의하며 그들의 노력을 칭송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 각자의 공동체들을 책임졌다. 아마도 도로시가 조직가가 아니었던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여겨진다. 가톨릭일꾼 집들은 필요가 있을 때 생겨나며, 우두머리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다.

도로시는 결코 사람들에게 매달리지 않았으며 다만 사람들이 그의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면 기뻐했을 뿐이다. 그는 그룹을 자신의 그룹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성령의 섭리에 맡겼다. 그는 기관을 만드는데 반대했으며, 오늘날 수많은 자발적인 가톨릭일꾼 집들의 성공을 위하여 후계자를 지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환대의 집들이 직면하는 문제들에 우려와 관심을 가졌으나, 두려워하진 않았다. 어떤 환대의 집 일꾼이 돈이 너무나 절실히 필요하다고 편지를 보냈을 때 도로시는 “마이클, 당신의 신앙은 어디 있어요?”라고 답장을 보냈다. 만일 그들이 그에게 기댄다면 잘못 판단하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도로시에게 그들의 불평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도로시의 십자가이기도 했다. 때때로 도로시는 사무실에 앉아 전화를 받거나, 사람들이 그에게 쫓아와서 그들의 싸움, 갈등을 말하곤 했다.

그리고 도로시는 환대의 집이 아니라, “적의의 집”에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을 다 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런 충고를 줬다, “아니, 아니, 당신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거부할 수 없어요. 누구 다른 사람이 그의 자리에 대신 오면, 지금 사람보다 더 힘든 사람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로시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뉴욕에서 함께 있는 것을 더 즐겼다. 척 메타이가 설명한다:

❧ 일꾼공동체의 삶은 일상으로 가득하고 어떤 때는 두렵기 조차 하다. 그래서 도로시가 그곳에 있는 것이 재미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즐겼다. 식사 후 늦은 저녁, 차를 마시면서 도로시와 함께 하는 좋은 대화를 즐겼다. 그가 집에 있을 때에는 여러 면에서 매우 유용했고 사람들은 도로시를 만나고 싶어했다. 창립자로서 직위 없는 지도자로서, 그는 어떤 안정감을 지니고 있었고 질서와 안전함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자극과 이야기와 삶 그리고 그것들의 더 큰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다.

제인 쌔몬은 도로시가 죽기 전부터 뉴욕 공동체에 함께 있었다:

❧ 도로시는 자석처럼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인품을 지녔다. 그러나 그는 그를 따르라고 전혀 격려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 사실,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했다. “당신은 사람들을 재활시키고 있습니까?” 그러면 도로시는 언제나 이런 대답을 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부터 재활시켜야 합니다.” 개인을 숭배한다는 것은 무척 위험스러운 일이므로, 도로시는 그냥 그것을 무시해 버렸던 것 같다.

인터뷰했던 몇몇 사람들이 여성운동과 도로시의 관계에 대하여 말했는데, 그들은 특히 1970년대 초기에 도로시와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짐 포리스트가 언급한다:

❧ 나는 그를 내노라 하는 의미의 여성주의자로 보지 않지만, 내적으로 그는 여성주의자였다. 말하자면, 그가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었으므로, 부담에 의해 여성주의자가 되는 선택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브라이언 테렐이 말한 것처럼, “도로시는 자기가 원했기 때문에 반항가였다.” 그러나 쥬디스 그레고리는 자기의 관점에서 볼 때, 여성주의에 관해서 도로시는 “매우 시대에 떨어진” 모습이었다고 한다:

❧ 나는 도로시가 비록 시끄럽고 자부심이 대단하고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그 당시의 여성해방운동에 관하여 매우 뿌리 깊은 오해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삶에서 모순을 보아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하고 싶은 대로 정확하게 할 수 있었지만, 그가 즐겼던 것들은 다소간 낡은 모형이었다. 이건 순전히 추측이지만, 나는 그가 내적으로는 남자들이 주역이라는 생각에 집착해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여성들은 보조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실제 상황에서 볼 때 모든 것이 –심지어 도로시의 삶을 봐도–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죠한나 휴 터너는 사람들이 도로시의 말을 경청할 때는 다른 여성들에게 할 때와 다르게 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댄 딜라니도 도로시에게서 그 비슷한 타고난 지도력을 느꼈다. “도로시는 여성이기 때문에 혜택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여성주의는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다.”

사람들이 도로시의 지도력에 대해 아무리 다르게 해석해도, 그와 함께 살았고 일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와 함께 지냈던 시간을 감사하게 여겼고, 아무리 독재적이었다고 해도 그의 지도력과 그가 그들에게 보여준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했다. 도로시 자신은 때때로 그가 양성했던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대부분이 점차 일꾼 집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신부인 루이 비탈에게, “가톨릭 일꾼은 체 같아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거쳐 지나갑니다. 그들은 여기에 정착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도로시의 긴 외로움이 생긴 또 하나의 이유이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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