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 가엾은 사람, 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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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가엾은 사람, 욥
  • 김신윤주
  • 승인 2016.05.25 1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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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으로 찬미 받으소서.”

욥기는 하느님과 사탄 사이의 잔인한 내기로 시작된다. 주제는 “과연 사심 없는 믿음이 있기나 하겠는가?”라는 질문이다. 내기의 대상은 흠 없음과 올곧음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함으로 널리 알려진 ‘욥’이다. 그는 하느님의 즐거움이요 믿음 깊은 종이었다. 사탄은 욥의 믿음이 세속적인 행복과 성공 속에서 쉽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비아냥거린다.

“...하지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도전을 받아들이고 그의 가엾은 종을 사탄의 손아귀에 넘겨준다. 순식간에 욥은 그의 가족과 재산, 최후에는 건강까지 줄줄이 잃는다. 욥은 보기에도 처참한 모습이 되어 질그릇 조각으로 제 몸을 긁으면서 잿더미 속에 앉아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욥기를 고통의 신비, 혹은 그런 고통을 허락한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묵상으로 읽는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욥기의 주제는 그 유명한 문구로 요약된다. “왜 착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것이 욥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확실한 질문이다. 욥에게 위안을 주기로 스스로 약속한 세 명의 ‘위로자’들은 그 답을 준다. 그들은 욥이 처한 상황 안에서 하느님의 권능과 정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심사숙고 한다.

그들은 “미덕은 곧바로 세속적인 보상으로 이어진다.”는 그 세대의 일반적인 생각과 믿음을 잘 보여준다. 이런 입장에 서면, 욥에게 어떠한 고통이 닥치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욥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고한 고통’이라는 현실을 그가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 욥 자신도 이들과 같은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부당다고 믿을만한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자, 욥은 또 다른 질문으로 건너간다. 즉, “무고하게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욥에 대한 페루의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신학적 접근이다. 구티에레즈 그 자신이 거대한 불의와 폭력, 그리고 가난으로 고통을 받는 상황 안에서 <욥에 관하여>라는 책을 썼다. 그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그들의 고통을 하느님의 뜻으로 체념하며 받아들이게 하고, 이 모든 상황을 그들의 타고난 운명으로 치부하려는 신학과 이데올로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신학은 약간 철학적으로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지지자들은 욥기의 ‘위로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대체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지를 잘 모른다. 최소한 그들은 욥이 알고 있는 것을 모른다.

구티에레즈에 의하면, 욥의 발언과 항의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현실감이 결여된 모든 신학에 대한 비판”이다. 욥은 흔히 ‘인내하는 자’로 불린다. 그러나 구티에레즈는 “욥은 저항적인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한다. “그의 저항은 무고한 고통을 거부하고, 그것을 정당화 하는 신학에 반대하며, 그런 신학이 전하는 하느님을 묘사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욥의 시작은 그저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한탄이었다. 그러나 결국 공허한 말만 반복하는 그의 ‘친구들’ 덕분에 그는 점차로 영웅적인 단계까지 올라간다. 가엾은 자에게 고통을 선물하는 우주의 설계를 거부하며, 하느님에게 도전하여 답변을 요구한다. 그 신비한 신앙의 비상 중에 그는 하느님에 대한 어떤 하나의 이미지까지 불러들인 듯 보인다. 자신의 고통을 저술한 하느님이 아니라, 무고한 이들의 옹호자인 하느님을.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욥을 분노케 한 친구들은 ‘신성모독’이라고 그를 비난했지만, 하느님은 욥의 도전에 마침내 폭풍 속에서 응답한다. 창조의 광대함과 신비에 대한 장고한 연설 끝에, 하느님은 욥을 괴롭히는 질문에 대한 답은 조금만 준다. 하지만, 우주의 창조자가 이 가여운 종을 만나려했다는 것과 그의 무고함을 지지해준 것만으로도 욥은 충분했다.

욥은 겸손하게 믿음을 증언한다. 하느님은 욥의 이런 면이 아니라 그 전에 친구들과 나눈 토론에서 그가 한 ‘올바른 말’을 눈여겨보고 언급한다. 반대로 욥의 친구들에게는 분노를 드러내신다. 연민과 연대의 실천이라는 의무를 무시하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노라 주장하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신성모독을 행한 자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그들의 구원을 전적으로 가엾은 사람인 욥의 기도에 의지하도록 명령하신다.

욥기는 어떤 역사적 인물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문학작품이다. 이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아마도 바빌론 유배기간 동안, 어느 익명의 유대 시인이 현대적인 글로 옮겨 쓰기 전 몇 세기 동안 회자된 고대의 민화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인들의 달력에 가상의 인물이 들어가도 되는 것일까? 욥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욥의 모습은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욥은 셀 수 없이 많은 쪽방과 판자촌의 주민들 속에서 ‘익명’으로 살고 있다.

구티에레즈는 말한다. “그들은 하느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대상이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들은 가난하고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비인간적인 처지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 ‘성인들’이 존경과 흠숭이 아니라, 사랑과 연대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Shine Shin-Kim, 김신윤주 수산나.
아티스트, 작가. 2013 년 뉴욕에서 대중참여예술인 원하트 프로젝트 시작,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한반도의 평화, 물신주의와 신자유주의, 인권, 사회 정의 차원에서의 위안부 문제 등을 다루며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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