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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사람에게서 하늘 길을 열다

[한상봉 칼럼]

그리스도교는 노예들의 종교다, 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심경이 어떠할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화들짝 놀라 부인하고픈 이도 있을 테고, 그래 맞아, 하며 무릎을 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노예가 되고픈 사람은 없을 테지만, 실상이 이승에서 노예처럼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교는 노예들을 위한 노예들의 종교라는 말이니까. 이 말을 할 때에는 사실 용기가 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이란 모름지기 자신을 노예와 동일시할 수 있어야 할 테니까.

 

도로테 죌레

그리스도교는 노예들의 종교

독일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시몬 베유에게서 이 말을 가져왔다. 철학자 알랭의 제자이며, 철학교사였던 시몬 베유는 타고난 공감능력 때문에 가난한 노동자들의 불행에서 거리두기에 실패한 여성이다. 그들이 겪는 하루의 노고가 그 몸에 감겨들어 시몬 베유를 힘겹게 하였다. 그녀는 급기야 공장 노동자가 되어 생활을 하면서 “그곳에서 나에게는 영원히 노예의 낙인이 찍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덧붙인다.

“육체적으로 비참한 상황에서 나는 어느 날 저녁 자그마한 포르투갈 마을로 들어갔다. 아! 그곳은 더 한층 비참했다. 더욱이 그날은 보름달이 높이 떠 있는 다름 아닌 성인의 축제일이었다. 그곳은 바닷가였다. 어부의 아내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부두로 향하는 행렬에 기어서 틀림없이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온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는 가슴을 찢는 듯한 비애로 가득 찬 것이었다. 그 무엇으로도 그에 관해 올바른 표상을 전해 줄 수는 없다. 나는 볼가 강변의 노동자들의 노래 외에 그렇게 마음을 사로잡는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것에서 갑자기 나는 그리스도교가 노예의 종교라는 사실, 그리고 노예들이 그리스도교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난> 도로테 죌레, 한국신학연구소, 1993, 163쪽 재인용)

시몬 베유가 문득 발견한 것은 불행의 낙인이 찍힌 자들, 피억압자의 종교였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처음 꺼낸 사람은 공교롭게도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그는 “신은 죽었다”며 강하게 그리스도교를 비판했던 사나이였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어느 신학자들보다 극명하게 밝혀준 철학자였다. 니체는 <반그리스도 Der Anti-christ>에서 그리스도교는 “가장 천한 신분, 즉 고대세계의 하층사회”에서 발생하였으며, “가련한 자, 스스로 고난받는 자, 죄책감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자, 영혼의 게토에 모인 사람들, 모든 실패한 자, 나쁜 길로 들어선 자, 인간쓰레기들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교는 “바닥에서 기는 자들이 높은 자들에게 저항하는 종교”라고 깎아 내렸다. 결국 그리스도교는 천한 죄인들에게만 복음인 종교라는 뜻이다.

니체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니체는 사회주의자와 그리스도교인을 동시에 공격한다. 그들은 모두 만인의 평등한 권리를 요구했으며, 노예들을 위해 투쟁하기 때문이다. 결국 니체는 예수의 신원에 대해서도 교회에선 들어보지 못한 엄청난 발언을 쏟아낸다. “천한 민중, 추방된 자, 죄인을 지배질서에 대항하도록 불러 모으는 이 ‘거룩한 무정부주의자’는, 오늘날에도 시베리아로 전해지고 있을 복음이 믿을만하다면 한마디로 정치범이었다. ... 이런 정치적인 이유로 그는 십자가에 달렸다.”

니체는 연민이나 동정을 “주인의 가치를 부인하고 파괴하는 노예의 도덕”이라고 했다. 약한 자를 더 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무산자와 저주받은 자들의 종교는 건강하고 강한 자들에 대한 숭배에 대항해, 무력하게 죽임당한 예수에게서 온전한 삶을 발견한다고 믿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이들은 슬픔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슬픔의 능력이란 자신과 타인의 거리를 파괴한다. 니체에게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우리의 끝없는 슬픔은 끝없는 사랑으로만 치유된다”(265항)는 말이나, 윤동주 시인이 노래한 <팔복(八福)>을 납득할 도리가 없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시몬 베유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 슬픔의 원천이 하느님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 야훼는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고 했다.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응답으로 모세를 그들에게 보낸 이가 하느님이시다. 노예들의 처지에 공감하시는 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 노예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느님께서 로마제국의 식민지를 살던 유대백성들에게는 예수를 보냈다고 믿는다. 그런데 더 기막힌 믿음은 그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곧 하느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이 복음서의 전갈을 단순히 ‘하느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말로만 단순히 이해하면 곤란하다. 복음서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긴 되었는데, 가난하고 핍박받는 주변부 인생으로, 이를테면 노예로 오셨다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출생 직후 헤로데왕이 죽이려고 해서 이집트로 가족과 함께 도망가야 했다. 이른바 예수는 초장부터 ‘난민’이었다. 그 부모는 객지에서 이주노동자로, 이주여성으로 살아야 했다, 그 조상들이 노예로 살던 이집트에서. 루카복음에서 갓 태어난 예수는 짐승의 거처에서 태어나 짐승의 먹이처럼 구유에 누워계셔야 했다. 그를 경배하러 온 사람들도 천한 직업에 속하는 목자들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분의 신원을 알려준다. 노예들의 하느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는 당대에 짐승처럼, 노예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해방하러 오신 분이다.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난한 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 때문에, 연민 때문에, 슬픔의 능력 때문에, 자비 때문에 노예가 되기로 작정하신 하느님을 선포하는 종교이다. 당연히 이 소식은 노예살이를 하는 이들에게는 복음이요, 권세 있는 자와 부자들에게는 흉음이다. 그런 이야기는 복음서 전편에 깔려 있으며, 예수에게 자궁을 내어 준 어머니 마리아의 노래에 극적으로 담겨 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루카 1,51-53)

 

영화 'Killing Jesus' 중에서

사람에게 하늘 길이 열리다

여기서 그치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께서 가련한 자기 백성을 위해 아들을 보내 세상을 평정케 하셨다는 진부한 서사시에 그치고 말 뿐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계속된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세상을 평정하지 못한 채 실패자로 십자가에서 ‘여느 노예들과 똑같이’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렇다고 이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결정적인 초점은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에 담겨 있다.

예수는 ‘가장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신다. 그분은 “나에게 해 준 것과 같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에 예수가 마지막 만찬에 앞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정결법에는 유대인 남자들에게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걸 금지하고 있다. 부정을 타기 때문이다. 설령 그가 노예라 해도, 유대인인 경우에는 주인이라 해도 그 노예에게 발을 씻으라고 요구할 수 없다. 유대인은 누구나 율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만찬 자리에서 율법에서 자유로운 ‘이방인 노예’가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셈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천시했는데, 게다가 노예라니. 예수는 이처럼 말뿐 아니라 몸으로 당신과 노예들을 동일시 하였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요한 14,9)이라고 말한 사람이 예수였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동격인 분이 ‘이방인’ 노예를 자신과 동일시하였다는 말이다. 여기서 노예들이 그리스도가 되고, 하느님께 가는 길이 열린다. 비록 노예라 해도 얼마든지 하느님의 딸아들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의 딸아이들이 될 수 있다면 하느님께로 밝히 가는 길이 열린다. 하물며 제자들은 더할 나위가 없다. 그분은 당신과 당신 제자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요한 13,20)이라는 게 예수의 생각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지만, 사실 죽지 않았다. 세상의 가난한 이들과 이들을 노예에서 해방하려는 ‘하느님 나라의 일꾼들’ 통해서 거듭 부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이 아니다. 또 다른 의미의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의 사람이다. 예수는 이천 년 전에 영웅적으로 하느님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하느님의 아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거듭 새삼 태어나고 이야기를 다시 이어갈 것이다. 하늘로 가는 길은 예수에게만 열려 있는 길이 아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심으로써 우리 모두에게도 하늘로 가는 문을 열어두신 분이 예수라고 믿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영화 'Killing Jesus' 중에서

하느님을 모시는 자, 그리스도인

구한말 서학과 동학은 어쩌면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최제우가 제시한 주문(呪文)에 등장하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하느님을 부모처럼 모신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은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뜻이고, 천도교 창시자인 손병희가 강조한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란 뜻이다. 이런 생각은 “사람 안에 하느님이 계시니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고 읽힌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의 교우들에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1코린 6,19)이라고 했다.

그러니 무작정 “사람=하느님”이라 생각하면 동학이든 서학이든 오해다. 내 안에 하느님이 들어와 앉아 계셔야 만인에게서 하늘을 본다. 보잘 것 없는 이에게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도로테 죌레는 그리스도인이란 ‘역설(逆說, paradox)을 사는 사람들’이라 했다.

“예수는 고난 받는 자들과 자신을 일치시켰으며, 그들의 병을 낫게 하려고 스스로 병이 들었다. 또 고난 받는 자들을 위해 모욕을 받았으며,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었다. 예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역설을 붙잡는 것을 의미한다.”(도로테 죌레, 같은 책, 169-170쪽)

하느님께서 노예들의 해방을 위해 노예가 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없는 곳에서 사랑하기 시작할 때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이 발생한다. 그분의 현존이 사람들에게 갑작스레 체험된다. 시몬 베유는 비참 한가운데서 더 이상 타인을 사랑할 수 없을 때, 그 하느님 부재의 허무 속으로 들어가서 사랑하기를 계속할 때 급기야 내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때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역설적 사랑이 답이다.

* 이글은 종이신문 <공동선> 2018년 9-10월호(통권 142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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