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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 대주교, 보수 성직자에서 민중의 목소리로오스카 로메로-4

로메로는 후기 현대 세계에서 죽음의 바닥에 버려진 가난하고 착취되는 사람들, 처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옹호한 “성인”이었다. 그는 평화 속에 죽지 않았고, 교회와 국가의 갈채를 받지 않고 죽었다. 그는 교회의 충실성을 지키고, 국가 권력에 도전하다가 폭력적인 죽임을 당했다. 로메로는 수년 동안 전통적이며 육화되지 않은 신학을 고수했으나, 복음을 위하여 세속 권력의 영역에 들어가기로 선택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는 일은 그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에게 궁핍을 강요하는 구조적 세력에 저항하라고 요구하였다. 돔 헬더 카마라가 말했던 이야기를 로메로도 똑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굶주리는 이들을 먹였을 때, 그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내가 왜 그들은 가난한가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

두 명의 로메로

보수주의자이고, 로마에서 교육받은 성직자가 무슨 까닭에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고, 소박한 부모의 조용하고 수줍은 아들이 어떻게 아메리카의 위대한 성인으로 선포되고 있는가?

1977년 2월, 로메로라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살바도르인들이 며칠을 사이에 두고 서로 교회와 국가의 가장 큰 권좌에 올라갔다. 2월 26일 국방부 장관인 카르로스 움베르토 로메로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주일간 벌어지는 가운데 결국 대통령으로 선포되었다. 이보다 며칠 앞서 2월 22일,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라는 온건하고 보수적인 교회 성직자가 산살바도르의 대주교로 취임했다. 아무도 그의 선출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새 대주교가 선임자인 루이스 샤베즈 이 곤잘레스 대주교의 진보적인 방향을 뒤집을까 두려워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조직적인 항의가 있었다.

“저는 농민단체에서 다양하고 진보적인 사제들과 일해 왔습니다. 모임을 하고 있을 때 로메로의 이름에 관한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모두가 일어날 일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보수적인 독재 정치의 큰 승리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맞서기 위하여 준비했습니다.”(니디아 디아즈)

대주교로 취임한지 얼마 안 되어, 오스카 로메로는 사제들에게 교회적 형제애와 신앙의 증언을 격려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가 말한 것에는 무엇인가에 도전할 것이라는 언질이 전혀 없었다. 그의 취임은 진보적인 성직자들과 이들을 옹호하는 샤베즈 대주교에게 피곤해 했던 권력가들에게 큰 안도감을 주었다.

또한 다른 살바도르의 주교들도 안심했는데, 그들은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데인에서 열린 전환점의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주창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을 인준한 샤베즈의 지지자, 아르투로 리베라 이 다마스 주교가 임명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로메로는 안전했다. 그는 좌파 사제들과 수녀들에게 맞설 것이라고 믿을만 했다. 로메로는 메데인 회의에 참석하여 수많은 기록을 했지만, 새롭게 등장한 해방신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대주교로 선출되기 일곱 달 전에 로메로는 혁명가들을 “증오에 가득 찬 그리스도론”이라고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가 선출됐을 때의 두려움을 회상하면서, 예수회 신학자 혼 소브리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는 매우 암울한 미래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했었다.”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는 신심이 깊은 소년이었고, 거룩한 사제이며 헌신적인 보좌주교였다. 그는 살바도르 군대, 정부요원들, 그리고 그의 작은 나라의 상류층 가족에게서 매우 존경을 받았다. 그의 조용한 지성과 엄격한 신학적 정통성은 살바도르의 동료 주교들, 교황 사절들 그리고 로마 주교단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거꾸로, 산살바도르의 대주교로 그가 선출된 일은 가난하고 종속된 살바도르 사람들 전체에 또 하나의 타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루틸fl오 그란데 신부 (Padre rutilio grande)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

로메로가 대주교로 취임한지 3주 안에, 특별한 사건들이 일어나 살바도르의 역사와 두 로메로들의 삶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다. 부유한 지주들은 토지없는 소작농부들에 대한 샤베즈 대주교의 지지를 무산시킬 수 있었으나, 여전히 교회가 권력에 위협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대통령이 저항세력에게 단호하게 행동하도록 부추겼다. 정부는 교회에 대한 박해를 증가시킴으로써 부자들의 요구에 응답했다.

경고는 분명했다. 5명의 외국 사제들이 추방되었다; 그러나 다음의 타격은 살바도르 교회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사제가 살해될 것이었다. 대상은 살바도르 예수회 회원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로, 그는 산살바도르 대교구에 속한 농촌지역 아길라레스에 기초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우는 신학생들과 교리교사들의 팀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란데 신부는 실제로 모든 비옥한 땅을 소유하고, 많은 소작인 농부들을 바위로 둘러싸인 산악지대로 내몰고 있는 부유한 지주들을 공개적으로 고발하였다. 엘살바도르는 14개 가문이 총 경작지의 60%를 독점하고 있었고, 이런 마당에 땅에 대한 소작농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은 지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특히 이 14개 독점적 가족들은 국가경비대, 경찰, 재무 경찰, 살바도르 군대, 부패한 사법체제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대통령과 국회는 이 한 덩어리처럼 모인 지배 권력에 감히 반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루틸리오 그란데는 이질과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굶주린 아이들에게 너무나 많이 병자성사를 주었다. 그는 지불해야 할 대가를 무릅쓰고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라고 끊임없이 부르짖었다.

그렇지만 사제를 죽이려는 계획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카르로스 움베르토 로메로가 범죄에 연루되지 않았다해도, 적어도 알고는 있었던 것 같다.

순교자, 그리고 대주교의 회심

3월 12일, 루틸리오 그란데는 엘 파이스날에서 저녁미사를 드리기 위하여 한 노인과 소년과 함께 키가 큰 사탕수수 밭을 지프차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 아길라레스와 엘 파이스날의 중간 장소에 복면을 한 사람들이 엎드려 기다리고 있다가 총을 쏴서 세 사람을 모두 죽였다.

그란데 신부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로메로 대주교는 아직 대통령 자리에 있었던 몰리나 대통령에게 조사를 요구했다. 그리고 나서 아길라레스로 떠나 밤 10시경 도착했다. 세 사람을 위한 미사를 하고 자정 쯤 떠났을 때, 무엇인가가 그를 변화시켰다. 한 농민사목 활동가가 그날 밤 로메로의 응답에 담겼던 슬픔과 놀라움을 묘사하고 있다:

“저는 루틸리오 그란데의 양말을, 피에 젖어있는 양말을 벗겼습니다. 저는 그의 시신 매장을 돕고 있었습니다. 살해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마치도 공중에 붕 떠있는 것처럼 느꼈고 그리고 나서 갑자기 땅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저는 너무나 놀라서 어떻게 교회에 가야 할지도 몰랐지요. 그리고 지금 나는 그날 일어났던 모든 일을 어떻게 내가 견딜 수 있었는지 의아해합니다. 저는 신부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피가 묻어있는 작은 헝겊 조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은 제가 아길라레스의 교회에서 이틀 밤을 철야하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신부님과 함께 만들었던 훌륭한 공동체들을 기억했습니다.

한밤중에 오스카 대주교님이 그란데 신부님의 시신을 보러 도착했습니다. 그는 시신을 모신 탁자 가까이 갔습니다. 하얀 헝겊에 싸인 신부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신부님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까 얼마나 신부님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까지 우리는 진짜로 대주교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처음으로 우리는 강론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분의 강론에 귀를 기울였을 때 우리는 매우 놀랐습니다. ‘대주교님은 그란데 신부님과 똑같은 목소리를 가졌네!’ 우리 모두가 말했지요.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에 루틸리오 신부님의 목소리가 대주교님께 들어간 것 같았으니까요. 바로 그때 그곳에서요. 진짜입니다.

저는 친구에게 속삭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놀라운 일을 우리를 위하여 해 주셔서 우리가 고아로 남아있지 않게 해 주신 것이 아닐까?’“(에르네스티나 리베라)

타인의 마음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런 사건이 로메로에게 어떤 깊은 영적 회심을 가져왔는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루틸리오 그란데가 살해된 후, 오스카 로메로는 결코 그전과 똑같지 않았다고 동의한다.

훌륭한 사제이자 훌륭한 친구의 살해가 로메로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의심할 바가 거의 없다. 로메로는 이 시골 신부를 겨우 한 달 전에 대주교 착좌식의 주례 사제로 선택했었다. 그란데 신부는 로메로가 예수회 회원들과 신학교에서 살고 있었을 때 수련장으로 있었다. 루틸리오는 모범적인 사제였다: 겸손하고 진지하며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로메로는 그란데의 아길라레스 사목 방향에 우려를 갖고 있었다. 그란데의 사목방침은 너무 급진적이었고, 메데인의 복음화 과정과 지나치게 함께 가고 있어서 위험하고, 조작과 대립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 마디로 하자면, 너무 정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란데의 시신을 직접 보고나서 로메로는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살바도르의 예수회 회원 혼 소브리노는 “그란데 신부의 시신 앞에 섰을 때, 로메로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쟈 나갔다”고 말한다. 비늘은 “교회를 역사의 모호하고, 갈등적인 현실 속에 잠기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소브리노에게 그 순간은 결정적이었다:

“저는 루틸리오 그란데의 살해가 로메로 대주교의 회심의 기회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ⵈ 루틸리오의 죽음은 로메로 대주교에게 새로운 행동을 할 힘을 주었습니다. ⵈ 그리고 로메로 자신의 삶에 근본적인 방향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로메로는 자신의 회심에 대하여 결코 말한 적이 없었고, 다만 살바도르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편으로 회심하도록 계속하여 권고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께 돌아서는 사람으로, 모든 믿음을 그분께 두는 사람이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께 돌아서지 않는 사람이고 우상에 믿음을 두는 사람들이다. 돈, 권력, 물질적인 것들에 ⵈ 우리의 일은 우리 자신과 모든 사람들이 정통적 의미의 가난에로 돌아서도록 하는 것이다.”(로메로, 목자의 일기에서)

대주교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

아마도 소박한 부모의 아들인 로메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제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그 치명적인 밤에 이어졌던 본질적인 변화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로메로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회심을 명백하게 말하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잘 이해하였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보살핌은 그가 산티아고 데 마리아의 보좌주교로 있을 때부터 일관되게 있어 왔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근본적인 변화의 어떤 씨앗들은 그 교구의 커피 노동자들이 겪었던 불의를 깨달으면서 심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편을 선택하는 것, 가난한 사람들에 반대하는 동맹세력에 직면하는 것, 갈등과 난장판의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망연자실했어도 로메로는 순교자 사제의 시신과 마주했으며,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단순히 루틸리오 그란데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의 숭고한 “전환”은 루틸리오가 자기 생명을 무릅쓰도록 끌렸던 것과 똑같은 명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엘살바도르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명분이었다.

그날 밤 장면을 상상해 보자. 교회는 사람들로 꽉 찼다. 교회에 들어갈 수 없었던 농부들은 바깥에 서 있다. 대주교가 교회의 복도로 걸어나가 제단 앞 하얀 헝겊 아래에 누워있는 세 시신까지 갔을 때 교회 안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도한 후 돌아서서 미사를 시작했을 때, 로메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백 명의 농부들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침묵이 로메로에게 물었다. 농부들의 눈은 로메로 홀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당신은 루틸리오가 했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설 것입니까?’

“수백 년의 고독”이 소리를 모았다. 소리가 없는 소리를. 로메로의 ‘예’라는 대답은 말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행동으로 대답할 것이다. 마지막에,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것이다. 그렇다, 죽음이 그를 침묵 시킬 때까지.

“저는 ⵈ 여러분에게 기도를 부탁하고자 합니다. 제가 저의 백성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이 약속에 충실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저는 반드시 저의 사명이 요구하는 모든 위험을 백성들과 함께 지고 갈 것입니다.”

로메로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농부들은 선한 목자를 원했으며, 그날 밤 그들은 선한 목자를 얻었다. 농부들은 이에 응답하여 그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결코 깨뜨리지 않았던 약속이다.

그날 밤 오스카 로메로는 아길라레스의 농부들이 하느님의 교회라는 것을 알아들었다. 이렇게 하여 “비늘이 그의 눈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즉 그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알아본 것이다. 농부들이 견디고 있었던 고난은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가 겪었던 고난이었다. 농부들 사이에서, 그들과 함께 걸으면서, 로메로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했던 소년 시절의 염원을 성취할 것이었다.

교회가 교계, 로마, 신학자들, 혹은 성직자들보다 훨씬 그 이상의 것임을 발견하면서 –기관 그 이상을– 교회가 사람들이라는 것은 확실히 로메로가 2차 바티칸공의회와 메데인에서 익숙하게 들었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로메로는 하느님이 사람들 속에 현존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로메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원의 성사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로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원출처] <오스카 로메로-삶과 글에 관한 성찰(1917~1980)>, 마리 데니스, 레니 골든, 스코트 라이트
[출처] <참사람되어> 2017년 11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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