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정희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
상태바
시인 고정희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
  • 한상봉
  • 승인 2016.05.03 15:3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행동하는 사랑> 리북, 한상봉 지음-2

흘릴 눈물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두 눈을 타고 내려와 내 완악한 마음을 다숩게 저미는 눈물, 세상에 남아 있는 것들과 세상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하는 눈물, 언제부턴가 눈물은 내 시편들의 밥이 되어 버렸고, 나는 그 눈물과 마주하여 지금 아득한 시간 앞에 서 있다. _ 고정희, <지리산의 봄>, 自序.

고정희 시인

시인 고정희는 1991년 6월 9일 지리산에서 계곡 물에 휩쓸려 타계하였다. 그는 유작시에서 이미 “오 하느님, 죽음은 단숨에 이슬처럼 사라져 푸른 강물에 섞였으면” 하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으며, 어머니의 입을 빌려 “저 칼날 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 몸이 상하지 않았구나, 다행이구나”(「독신자」) 하며 제 삶을 결산하고 있다. 그녀가 토해낸 시편들은 하나같이 인간에 대한 깊은 자애의 눈물이 배어 있으며, 세상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연민과 자기 초월의 의지가 담겨 있다.

그가 맞붙어 싸웠던 거인은 바벨탑을 건설하는 자본주의의 망령이었다. 시인은 그 망령 때문에 주눅 들고 희생당하는 중생을 위해 투신하였다. 따라서 망령에게 상처입고, 중생들의 슬픔에 동참하는 눈물이 시편의 밑바닥에 여지없이 흐르고 있다. 그의 시편을 따라 읽으면서 우리는 삶의 정수리를 꿰고 있는 진실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 글은 고정희가 남긴 시편들을 가능한 원문 그대로 살리되, 산문체로 바꾸어 읽는 이들이 한 편의 에세이를 대면하는 것처럼 편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시인의 영혼에 흠집이 나지 않을까 저어하는 심정이 크지만, 시인의 마음을 우리가 따라 배우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용기를 낸다.

악령은 시궁창에 있지 않다

시대별 유니폼 속에 단정하게 개켜 놓은 밥―이데올로기, 그 속에 스며 있는 우아한 노예 패션, 삐까 번쩍 포장한 프린세스 라인이며 로열박스 리본에 후르르르르 불을 당겨 이열치열 불마당을 만들고 싶어집니다. 하인들이 열고 닫는 대문을 보면 나는 이심전심 불지르고 싶어집니다. 우람한 대문으로 넘나드는 명부전의 자부심과 높다랗게 치솟은 치부의 쇠창살, 난공불락 이기주의 담쟁이덩굴에 화르르르 불을 당겨 우리의 소원은 평등 ... 꿈에도 소원은 분배 ... 해방의 모닥불 만들고 싶어집니다. 아아 우리를 배 아프게 하는 것을 보면 나는 불현듯 불지르고 싶어집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너무 많은 땅 문서, 너무 많은 돈 문서를 보면 나는 불지르고 싶어집니다. 당신이 차지한 너무 큰 하늘, 너무 위대한 밥그릇을 보면 나는 불지르고 싶어집니다. 당신이 생산하는 너무 많은 정경유착 면죄부와 하수인 리스트와 팔려 간 신부들의 정조대에 우르르 쾅 불을 당겨 따뜻하게 평화롭게 불감증의 시대를 청소하고 싶어집니다. _ 「우리를 불지르고 싶게 하는 것들」

시인은 자본주의를 사는 사람들에게 불안스레 “불원간 밥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은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바이러스 엑스를 경보함」)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악령의 자본이 시대를 제패한 후, 그대는 이제 꿈꾸는 것만으로는 안식의 밥을 갖지 못하네. 기다림이나 신념 따위로는 그대는 이제 편히 잠들 수 없네. 영혼의 방에 불을 끈 그대가 악령의 화려한 옷자락에 도취된 후, 품위 있고 지적이며 인자하고 또 매우 귀족적인 악령의 도술에 반해 버린 후, 궁핍한 인본주의는 죽었네. 사랑도 그대도 죽었네.”(「악령의 시대, 그리고 사랑」)라며 음산한 자본주의 종말론을 펼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자본은 이미 ‘재물’이라는 말로 다 담아 낼 수 없는 언표이다. 자본은 예수가 ‘맘몬Mammon’이라는 말로 인격화시켰듯이, 이 세상에 입성하여 만인을 다스릴 통치권자로 등장한다. 그는 새로운 신으로서,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에 슬픔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촉각을 마취시키면서, 어린 영혼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선포를 알리는 ‘주님의 기도’를 받아 외우게 만든다. 이는 일찍이 로마 황제가 군사력의 힘으로 ‘로마의 평화’를 선포하고, 황제 숭배를 강요했던 것과 같다.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 계신 우리 자본님.
가진 자의 힘을 악랄하게 하옵시매
지상에서 자본이 힘있는 것 같이
개인의 삶에서도 막강해지이다.
나날에 필요한 먹이사슬을 주옵시매
나보다 힘없는 자가 내 먹이사슬이 되고
내가 나보다 힘있는 자의 먹이사슬이 된 것 같이
보다 강한 나라의 축재를 북돋으사
다만 정의와 평화에서 멀어지게 하소서.
지배와 권력과 행복의 근본이 영원히 자본의 식민 통치에 있사옵니다.
_ 「새 시대 주기도문」

그런데 문제는 우리 시대에 성령과 악령을 구별하기가 무척 힘들다는 데 있다. 시인에 따르면, 자본의 악령은 상당히 미묘해서 대단히 뛰어난 식별력을 요구한다. 악령은 인간의 모습으로, 대저 인간이 꿈꾸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악령은 시궁창 모습으로 살지 않습니다. 악령은 마귀 얼굴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악령은 누추하거나 냄새 나는 손으로 악수하지 않습니다. 악령은 무식하거나 가난하지 않으며 악령은 패배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악령은 성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를 범하지 않습니다. 악령은 아름답습니다. 악령은 고상하며 인자스럽고, 악령은 언제나 매혹적이며 우아하고, 악령은 언제나 오래 기다리고 유혹적이며, 악령은 언제나 당당하고 너그러운 승리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일단 제압한 뒤 우리의 밥그릇에 들어앉습니다. _ 「다시 악령의 시대를 묵상함」

여기서 시인은 악령을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호가 분열과 분단이며, 악령은 정복자의 승리를 지향하고, 전쟁과 학살을 통해 생존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악령이 깃든 곳에 거짓 행복, 거짓 평화, 거짓 통일이 있으며, 악령은 죽음에 이르는 ‘강시 천국’에서 완성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정복자의 승리에 축전을 보내고 그러므로 내가 아직 분열 분단 속에 살며 그러므로 내가 아직 학살의 역사 속에 있다면 내 시대는 바로 악령의 시대”라고 판단한다. 이 마당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대(하느님)를 향한 내 꿈을 불살라야 합니다. 그대를 악령과 바꾸지 않기 위해서”(「다시 악령의 시대를 묵상함」).

행방불명되신 하느님께 보내는 출소장

자본의 악령이 지배하는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책무는 성령을 되찾아 오는 일이다. 하느님께 하소연하며, 하느님의 길로 교회가 더더욱 의연히 자리 매김하는 일이다. 그러나 교회마저도 악령에게 팔아 넘겨졌다면 어찌할 것인가? 우리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누가 악령에게 대적할 것인가? 시인은 행방불명되신 하느님께 출소장을 보내며 기성 교회를 탄핵한다. “대답해 주시지요, 하느님. 당신은 교회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교회의 창고부터 열어야 합니다. 이 곤궁한 시대에 교회는 실로 너무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교회는 너무 많은 재물을 가졌고, 너무 많은 거짓을 가졌고, 너무 많은 보태기 십자가를 가졌고, 너무 많은 권위와 너무 많은 집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파당과 너무 많은 미움과 너무 많은 철조망과 벽을 가졌습니다. 빼앗긴 백성들이 갖지 못한 것을 교회는 다 가졌습니다. 잘못된 권력이 가진 것을 교회는 다 가졌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벙어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장님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귀머거리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직 침묵으로 번창합니다”(「행방불명되신 하느님께 보내는 출소장」).

권력과 자본에 심취한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을 저버렸다. 히브리인들의 하느님,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았던 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결국 하느님을 실종시키고, 자본의 악령이라는 우상을 주님으로 섬기면서 종교 상품으로 타락한 교회를 시인은 아벨의 죽음을 들어 예언자적 직관으로 고발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오,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안락한 처마 밑에서 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너희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풍성한 산해진미 잔칫상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던 우리들의 아벨, 우물가에서 혹은 태평성대 동구 밖에서 지친 등 추스르며 한숨짓던 아벨, 어둠의 골짜기로 골짜기로 골짜기로 거슬러 오르던 너희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믿음의 아들 너 베드로야, 땅의 아버지 너 요한아, 밤새껏 은총으로 배부른 가버나움아, 사시장철 음모뿐인 예루살렘아, 음탕한 왕들로 가득 찬 소돔과 고모라야, 너희 식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침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교회당과 아벨을 바꿨느냐? 독야청청 담벼락과 아벨을 바꿨느냐? 회칠한 무덤들, 이 독사의 무리들아 너희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일흔 일곱 날 떠돌던 아벨을 보았느냐? 아흔 아홉 날 한뎃잠을 청하던 아벨을 보았느냐?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돌들이 일어나 꽃씨를 뿌리고 바람들이 달려와 성벽을 허물리라. 지진이 솟구쳐 빗장을 뽑으리라. 바람 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아벨의 울음은 잠들지 못하리. 오 불쌍한 아벨, 외마디 소리마저 빼앗긴 아벨을 위하여 나는 너희 식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아방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별장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교회당과 종탑을 엎으리라. _ 「이 시대의 아벨」

하느님은 민중 아벨의 죽음, 상품으로 팔아넘길 수 있는 육신과 지식을 갖지 못하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며 소외받는 그늘에서 널브러져 신음하고 있는 아벨의 참상 앞에서 오열하고 함께 고통 받고 계신다. 예수가 십자가 위 죽음에 이르는 고통 속에서 ‘하느님 없음’으로 절망했을 때에도, 그분은 그 자리에서 아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죽어 가셨듯이 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전한다. “어젯밤에 전화선마저 뚝 끊어졌어요. 마지막 수신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폭풍우 치는 밤에 섬에서 들어본 하, 하느님의 비명 소리였어요”(「땅의 사람들」).

마음이 여리고 연민이 가득 찬 사람들은 이 비명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아 무거워라, 나의 등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여. 등골을 짓누르는 암흑의 그림자여. 겨울 야산들이 잠드는 언덕에서 가볍게 가기 위해, 나는 짐을 내려놓고 또 내려 놨건만 내려놓을 수 없는 사랑의 청춘. 끝내 살 속에 무덤을 만들고 뼛속에 만리장성 쌓으니, 나는 네게 한 발짝도 다가갈 수 없구나. 숙명의 자투리에 나는 갇혀 있구나. 하늘에 별 떨기 검푸른 밤에도 나의 머리맡에는 저주의 낱말들이 웅성거리고, 상복을 입으신 하느님의 신음 소리 새벽 유리창을 덜컬덜컹 흔드시니, 사십 년 유랑하던 갈대밭 광야에 오늘은 강 하나 제 갈 길로 흘러갈 뿐이다. 아 보고 싶어라. 꿈에도 그리는 그대 살고 있는 땅, 나는 예서 한 발짝도 다가갈 수 없구나”(「땅의 사람들」).

이 안타까운 상황에서 시인이 느끼는 것은 하느님의 절망이다. “동서남북에서 하느님 우시는구나. 허리 휘어지는 빚잔치, 기둥뿌리 무너지는 꽃잔치, 만조백성 허수아비 잔치에 입 없는 하느님 우시는구나. 적막강산 줄줄 우시는구나”(「천둥벌거숭이의 노래 9」). 이때에 인간을 구원으로 이끎으로써, 하느님마저 구원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좋다. 절망적인 상태를 절망하는 자, 슬퍼해야 할 곳에서 눈물 흘릴 줄 아는 자, 다른 이들의 고통을 제 뼛속에서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며 울부짖는 자, 끝없는 절망까지도 견뎌 내는 자만이 인간을 천상으로 인도한다. 악령에 의해 무뎌진 돌심장을 걷어 내고 살심장을 심을 줄 안다. 하느님 없이 하느님을 사랑한다. 시인은 한 사내를 만난 심경을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나 친구여, 나는 오늘밤 오만한 절망으로 똘똘 뭉쳐진 한 사내의 술잔 앞에서, 하느님을 모르는 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쁜 우매함인가를 다시 쓸쓸하게 새김질하면서, 하느님을 등에 업은 행복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도착 신앙인가도 토악질하듯 음미하면서, 오직 내 희망의 여린 부분과 네 절망의 질긴 부분이 톱니바퀴처럼 맞닿기를 바랐다. _ 「서울 사랑―절망에 대하여」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는 함께 구원받는다. 이 세상이 망가진 연유를 캐어 묻다보면, “네 탓이오!”를 연발하는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교회와 인생들에게서가 아니라, 자기 가슴을 먼저 쥐어뜯으며 머리에 재를 뿌리고 통곡하는 사람들 안에서 구원의 첫 빛살이 인류에게 날아든다. “한 세대 긁고 지난 칼자국이 어디 내 죄값뿐이랴만 내가 달과 마주서니 속물일 뿐이어서, 국화 한 다발도 속될 뿐이어서 달로 떠오르는 네 외짝 눈과 만나니 부끄럽구나. 한 평 땅 덮지 못할 내 빛, 무력한 근심이나 보태는 오늘”(「망월리 碑銘」)을 참회하는 눈물 속에 희망이 건져진다. “어둠이 완전히 창을 지워 버렸을 땐 넋장이 무너지듯 내 아픔도 깊어져 하염없는 슬픔으로 어깨 기침을 했다. 누군들 왜 모르랴. 어두워지는 건 밤이 아니라 속수무책의 한 생애, 무방비 상태의 우리 희망이거니”(「황혼 일기」).

이들은 절망의 끝내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대 뒤로 하고 산을 내려올 때 툭 불거진 돌부리에도 내 생애 전부가 훅훅 휘둘렸다. 캄캄한 밤이었다”(「산지기를 노래함」). 그리고 이젠 그대, 하느님을 제대로 찾기 위하여 허튼 삶의 뿌리를 걷어 낼 준비를 한다. “이제부터 인생이 무어냐고 묻거든 허튼삶 삽질하는 힘이라고 말해둬. 이제부터 목숨이 무어냐고 묻거든 허튼넋 몰아내는 칼이라고 말해둬. 대쪽 같은 사람들아, 금쪽같은 사람들아, 각자 목숨에 달린 허튼밥줄 가려내”(「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

뉴욕 맨하탄의 마천루와 대성당. ⓒ한상봉

상처받은 영혼을 위하여

고통을 피해 가서는 고통을 이겨 낼 수 없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에어컨에 의지할 필요는 없다. 일시적으로 내 피부가 시원한 기운을 느끼겠지만, 세상은 에어컨이 뿜어내는 더운 바람에 더욱 기온이 상승하고, 온통 하늘이 터져 버릴 것 같은 용광로가 되는 법이다. 그러니 고통이 오면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 고통의 너머로 하늘이 열려 있음을 보아야 한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하여,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고 수용함으로써 부활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가난은 저주이지만, 그 가난에 투신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통로가 된다. 상처 속에서 그 치유의 힘도 나온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나니. _ 「상한 영혼을 위하여」

시인은 치유자가 된 ‘상처받은 영혼’에 대해서 말한다. 그분은 갈릴래아의 예수였다. “불볕 같은 햇빛 아래 사내는 지쳐 쓰러지고 갈릴리 해변은 한없이 적막한 바람에 뒤덮이고, 아, 한 사내가 골고다 언덕에 다시 쓰러지고 있었습니다. 목말라 비틀거리는 사내는 자기 키보다 더 큰 나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골고다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그녀의 한에 절은 눈물과 가슴을 외면한 채 주검보다 무거운 고독에 짓눌린 마리아. 그녀의 폭탄 같은 오열을 외면한 채 사나이는 먼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사내는 대학을 다닌 적도 없습니다. 부귀를 누린 자도 아닙니다. 권력을 가진 적도 없습니다. 그럴싸한 명사를 만난 적도 없습니다. 가난한 거리와 버림받은 이웃과 냄새 나는 유대의 거리, 그 천한 백성들의 눈물과 한숨이 있었을 뿐입니다. 율법에 두 발 묶인 죄의 사슬에서, 무섭도록 외로운 삶의 멍에로부터 도망 치고 싶을 뿐인 불쌍한 무리들, 동정 받을 일밖에 없는 히브리의 단 하나 친구인 그리스도는 가진 것 없는 당신 주제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줘야 했습니다. 처음엔 기적을, 그 다음엔 정신을, 그 다음엔 영혼을, 그 다음엔 그의 전 생애와 주검까지도 죄 많은 유대에게 넘겨 줘야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세상 죄 다 짊어지고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다 쏟아 버린 그 사내가 성금요일 오후 세시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성당의 휘장이 갈라지고, 그를 본 영혼들은 한꺼번에 쩍, 금이 가고 있었습니다”(「히브리 傳書」).

예수를 본 영혼들의 가슴이 엄청난 충격 속에서 깨달음으로 달음박질 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연민 때문이었다. 연민이 그 죽음을 달게 받아들일 힘을 예수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연민은 비열한 배신과 우상 숭배의 늪에서도 인간을 구출한다. 탐욕의 피라미드에서도 민중 해방의 유토피아를 꿈꿀 용기를 준다.

구정동아, 구정동아, 아직도 내가 너를 짝사랑하는구나. ... 암탉이 병아리를 품어 안듯 내 너를 안으려 얼마나 애썼더냐. 네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말할 날을 간절히 기다렸으나 그때마다 너는 거절하였다. ... 시대의 재난이 강물처럼 흐르는 시대에, 너는 망령보다 고약스런 거드름을 피우며 가난한 백성과는 상종조차 멀리하고 축재를 뽐내는 특권층이 되려느냐? 탐욕의 피라미드에 금테를 덧입히고 피묻은 바벨탑에 장식을 매달면서 교만의 기운이 문전마다 꽉 찼구나. ... 강남아, 가파르나움아 가혹하고 고통스런 환란의 시대에 내 백성의 피땀으로 호화스럼을 누린 자는 다 무서운 폐허에 떨어질 것이다! 정녕 나는 너를 어쩌란 말이냐. ...

제자들이 부자 동네에서 묻은 신발의 먼지마저 다 털고 난 후 예수의 발길을 재촉할 제 돌연 행색이 초라하나 두 눈에서 광채가 나는 한 여자가 다가와 예수의 발길을 가로막았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영광을 받으실 이여, 이 땅에서 등돌림을 조금만 늦추소서. 이 땅에서 연민을 거두지 마옵소서. ... 이 땅 어디서나 하느님 나라의 씨알인 죄없고 순결한 어린 영혼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옵니다. ...

땅바닥에 지팡이로 묵묵히 금을 긋고 계시던 예수께서 그 여자를 향하여 나즈막이 말씀하셨다.

자매여, 네 사랑이 믿음을 구했다. 그대 속에 인류의 어머니가 있노라. ... 가자, 그대 처마 밑에서 하룻밤을 묵으리라. 그대 거처를 근심하지 말라. 나는 대접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내 백성의 고난을 싸매러 왔다. 그대 고통이 서려 있는 처마 밑이면 족하다.

그리고 앞장서 일행과 함께 산동네 비탈길을 향하셨다. 찬란한 햇빛이 그 뒤를 따랐다. _ 「구정동아 구정동아」

시인은 이 예수 사건 속에서 “그가 앉았다 일어선 자리에서 오월의 초저녁 바람이 불었다. 나는 심장에 플러그를 꽂았다”(「땅의 사람들 7」)고 고백한다. 그리고 땅의 사람들, 암 하레츠의 자리로 내려오는 길만이 세상과 인간을 구원한다는 전범을 얻는다. “이제야 알겠네 먹물일수록 찬란한 빛의 임재, 그러나 빛이 된 사람들아 그대가 빛으로 남는 길은 그대보다 큰 어둠의 땅으로 내려오고 내려오고 내려오는 일. 어둠의 사람들은 행복하여라”(「서울 사랑―어둠을 위하여」).

꿈꾸는 들판의 풀포기

인간에 대한 연민은 당연히 혁명을 낳는다. 악령을 거슬러 투쟁하는 백성들의 성전聖戰은 먼저 자기 안의 악령을 쫓아내는 구마 행위로 나타난다.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구석구석에 배인 자본주의의 묵은 때를 갈라내야만 한다. 이를 성경은 희년을 선포하라는 명령으로 알아들으며, 히브리 백성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다시 입적되는 날을 선포하는 것이다. 자기 갱신 없이는 어떤 해방도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하느님의 입을 빌어 말한다. “해방절은 자기 몸에 칼을 대는 혁명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 나라 해방절 운동은 그리스도인이 몸에 칼을 대는 혁명이다. 교회가 곳간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닫지 않는 혁명이다. 주린 자가 다시는 주리지 않게 되는 혁명이요, 억울하게 갇힌 자가 다시 갇힐 일이 없는 혁명이다. 당연히 차지해야 할 사람의 밥그릇 당연히 지녀야 할 사람다움의 세상을 내 백성에게 되돌려 주는 혁명이다”(「해방절 도성에 찾아오신 예수」). 이 혁명은 봄비가 수문을 열고 대지를 적시듯이 온 들판으로 나아간다. 세상으로 전파된다.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 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_ 「땅의 사람들 6」

그러나 단호하게 ‘그리스도의 평화’를 살아냄으로써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 이를 ‘샤티아 그라하眞理把持’라 해도 좋고, 비폭력 저항 운동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자기 갱신을 통한 세계 변혁을 이루자는 것이다. 여기에 요청되는 것이 곧 예수의 ‘제자’됨의 삶이다. 이 세상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파견된 자로, “세상 속에 더 깊숙이”, 그러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투쟁하는 삶이다.

시인은 이 길에서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돈주머니를 지니지 말며,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양식 자루를 지니지 말며,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여벌 신발도 지니지 말아라, 분부하신 그 말씀. 평화를 추수하러 가는 너희는 내 평화를 배척하는 집에 머물지 말며, 평화를 추수하러 가는 너희는 내 평화를 모르는 식탁에 앉지 말며, 평화를 추수하러 가는 너희는 신발의 먼지도 다 털어 버려라, 당부하신 그 말씀”을 기억해야 하며, “너희가 입으로는 평화를 원하면서 마음엔 두 주인을 섬기고 있구나. 진실로 평화를 원하거든 너만의 밥그릇을 가지지 말며, 진실로 통일을 원하거든 너만의 돈주머니를 챙기지 말며, 진실로 평화 통일을 원하거든 너만의 천국을 꿈꾸지 말아라, 이르시는 그 말씀”(「평화를 위한 묵상 기도」)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기준을 철저히 뛰어 넘어서야 한다. 세상은 상식을 진리라고 강변하지만, 진리는 오롯이 진리일 뿐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주눅 들지 않고 상식을 거슬러 읽을 눈이 있는 자는 악령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니, 그 자유가 진리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설을 사는 까닭에 서늘한 향기, 슬픈 깃털을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 ‘그대’를 사는 것이다. 아득한 능선을 따라 오르고 내려 아름다운 영혼으로 사는 것이다. “이 온몸을 싸고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 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 우르르 우렛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 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 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 흐르고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소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지리산의 봄 1」).

이러한 작은 깨달음 속에서만이 “작은 풀꽃 하나가 지구의 회전을 다스리기 위해서 하늘과 땅 사이 뿌리 박고 섰나니”(「가을 보내며」)라고 노래할 수 있으며, 민중이 우주의 중심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늘의 숨결을 감지한다.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옆에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 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평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_ 「천둥벌거숭이의 노래 10」

여기서, 인간은 자본의 굴레에서, 그 미혹에서 해탈한다. 상품화된 아름다움에서 아예 눈을 돌리고 질박한 풀꽃에 맺힌 이슬방울에 눈물 흘리며 감격한다. 노동의 땀과 휴식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래서 인간은 한 그릇의 물과 한 움큼의 흙과 맑은 공기에 감사한다.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앉은 일일 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 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 사발을 들어올릴 때」).

자본의 악령은 우리가 뒤를 돌아볼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하여, 제 삶의 악마성을 발견할 겨를을 주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경쟁과 속도를 강요한다. 다른 이들을 돌아볼 틈새가 전혀 없는 인간은 이미 악령의 포로가 된 몸이다. 이러한 상황은 밥을 미끼로 하여 폭력으로 관철되는 가부장적 질서에 뿌리 내리고 있기에, 이 뿌리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시인은 여성, 그 가운데서도 어머니의 마음에 천착한다. 그 너그러움과 자애에 천착한다. “산들이 마을로부터 무너지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나무들이 뿌리를 창궁으로 치켜들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생명 있는 것들의 너그러움, 부드러운 흙가슴의 너그러움, 어머니가 방생한 너그러움, 임신한 여자가 담보 잡힌 너그러움일 거야. 등뼈를 쓰다듬는 너그러움, 살기를 풀어주는 너그러움, 아아 우주의 너·그·러·움·일·거·야”(「어느 날의 창세기」).

그 너그러움은 여백을 남긴다. 다른 영혼이 자리 잡을 공간을 마음속에 마련해 놓는다. 그 안에 온갖 창생創生이 들어와 앉고, 성령이 빛을 내뿜는다. 시인은 어머니가 다른 생명으로 건너간 뒤에야 이 여백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 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 두셨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쓰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모든 사라지는 것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그 여백 안에서 일생을 꿈꾸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참 평화’의 일꾼이 되며, 하느님께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수납된다. “오 하느님, 칼을 쳐서 밥을 만들고 창을 쳐서 떡을 만들던 손 그가 여기 잠들었나이다. 우리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우리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며 우리가 곤궁했을 때 기댈 등 주던 몸 그가 여기 잠들었나이다. 하늘 문 열으소서. 그의 영혼을 손잡으소서”(「하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안셀모 2016-05-04 19:17:48
고정희 시인을 통째로 만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