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 야구경기장, 송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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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 야구경기장, 송 할아버지
  • 최충언
  • 승인 2016.05.0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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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언 칼럼]

현대인들은 바쁘게 살아간다. 속도 전쟁이다. 기차를 타도 바깥 풍경을 구경하지 못한다. 생존경쟁에 내몰려 앞만 보고 달리니 옆이나 뒤를 돌아보지 못하거나 스쳐 지나기 일쑤다. 산길을 걷다가도 들꽃을 보려면 허리를 굽히고 아래를 세심히 쳐다봐야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늘지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외면하지는 않은 지 되돌아봐야 한다.

좌판에서 채소나 생선을 파는 할머니, 손수레에 과일을 파는 아저씨, 파지를 주워 힘겹게 오르막을 오르는 사람들, 계단에서 구걸하는 노숙인, 빈 방에 홀로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독거노인, 높은 보도블록에 애를 먹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와 철거민, 일자리를 잃은 고통을 온몸으로 겪는 해고노동자, 현대판 노예로 살아가는 이주노동자. 헤아리자면 끝이 없다. 저마다 버거운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난한 이웃들이다.

천사는 이웃에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럼 우리도 이웃에게 천사인가? 물을 차례다. ⓒ김용길

3년 전 여름이었다. 프로야구 롯데의 홈경기가 열린 사직야구장에서 송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다. 언제나 우리 자리는 포수 뒤쪽 일반석 꼭대기다. 우리 곁으로 남루한 바지 차림에 큰 비닐봉지를 두 개나 들고 바닥에 앉아 쉬고 있는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봉지 안에는 찌그러져 납작해진 빈 맥주 깡통이 들어있었다. 궁금했다. 보통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아직 올 시간이 아닌데, 깡통을 줍기 위해 다니실까?

과일과 음료수를 드렸더니 고맙다며 맛있게 드셨다. 친구와 나는 비닐봉지를 들고 야구장 쓰레기통을 뒤졌다. 맥주 깡통 열 댓 개를 담아 할아버지께 드렸더니 웃으시며 고맙다고 하셨다. 우리가 모아 온 깡통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우그러뜨리는데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빈 깡통의 아래 위를 두 손바닥 사이에 놓고 한 번에 납작하게 만드는 모습에 진한 삶의 의지를 느꼈다. 호기심이 나서 할아버지께 슬며시 여쭈어 보았다.

“하루에 벌이가 얼마나 되세요?”
“킬로에 신문지는 100원, 파지나 박스는 90원 해. 깡통은 돈이 되지. 킬로에 천원을 받으니까. 하루에 오천 원에서 만원 벌어.”

일흔 일곱인 할아버지는 사직구장 뒤편 쪽방에 사신다. 야구경기가 있는 날에는 빈 깡통을 줍고, 없는 날에는 파지를 줍는다 하셨다. 할아버지는 보증을 잘못 섰다가 쫄딱 망했다고 했다. 그 일로 5년 전 이혼을 하고 홀로 사신다 했다. 쪽방 달세가 3만원. 그 방을 둘이 쓰니까 달세는 절반인 셈이다. 목욕탕에서 피로도 푸시고 몸도 씻으시고 따뜻한 밥이라도 사 드시라고 일행들에게 추렴을 해서 드렸다.
“할아버지, 내일도 우리 이 자리에서 경기 구경할 겁니다. 이 시간에 꼭 오세요. 저희가 저녁밥으로 김밥을 준비해 올게요. 함께 먹어요, 예?”

할아버지는 연신 고맙다며 그러겠노라며 빈 깡통을 줍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셨다.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가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니 다리를 절었다. 마음이 짠했다.

다음날, 야구장 같은 자리에서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 김밥을 나누어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었다. 점심을 걸렀다고 했다. 언젠가 르포 집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점심을 굶는 도시의 노인부부 이야기다. “내외의 외출은 끊임없이 걷는 일이 전부다. 앉아 있으면 먹는 것이 생각나고 심사가 복잡해지니 무릎이 허용하는 한 걷는 수밖에 없다.” 아동결식도 그렇지만 노인들도 밥을 굶으면 되겠는가.

주위를 둘러보면 끼니를 굶는 노인들이 상당히 많다. 다리를 저는 게 마음에 걸려 물어보았다.“할아버지, 허리가 안 좋으세요?”

스무 해 전, 대우조선에서 일할 때 사다리에서 떨어져 심하게 다쳤고, 이태 가까이 병상에 누워 있었다며 이를 드러내며 웃으셨다.
“그래서 내가 장애인 4급이잖아? 보험금을 가지고 마누라는 도망을 가버리고...”

그렇게 독거노인이 되었다. 기가 막혀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지금 내 왼쪽 허벅지 뼈는 다 인공뼈야.”

한우 소고기 버거는 나중에 먹겠다며 따로 챙기신다. 아마 저녁끼니로 드실 모양이었다. 김밥을 드시고 난 뒤, 어제 고마웠다며 다시 감사의 표시를 하고는 깡통을 줍기 위해 자리를 뜨셨다. 나는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힘드시면 언제라도 연락을 달라고 당부했다.

며칠 전, 반가운 목소리로 통화를 하던 아내가 전화기를 바꾸어 준다. 송 할아버지였다. 요즘은 파지를 줍는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야구장에 맥주 반입이 금지되어 타격이 크다고 하셨다. 요즘은 파지를 주워 하루 4,000원 가량 번다고 한다. 삼년 만에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요즘 형편이 어려우신가보다. 요즘은 야구장에 오지 않느냐고 물으셔서, 계획에 없었지만 오늘 야구장에 간다고 말씀드리고 같은 장소에서 뵙자고 했다.

계단을 올라오시던 할아버지는 단박에 우리를 알아보셨다. 얼굴은 좋아보였다. 아내와 준비한 김밥을 드렸고, 끼니는 거르지 마시라고 지갑을 조금 열었다. 할아버지는 고마움의 표시로 허리를 굽혔고, 나도 덩달아 건강하시라며 허리를 숙였다. 할아버지의 마대자루에는 약간의 빈 깡통이 들어 있었다.

1976년 세계성체대회 강연에서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 조금씩 가난해지도록 노력합시다. 제 어머니께서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만 덜 가지면 한 사람 몫이 나온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 식탁에는 언제나 한 사람 몫의 자리가 더 있었어요.”

가진 게 많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달동네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보아도 그렇다. 그땐 깨어진 접시에 담긴 김치를 담 너머로 나누던 살가움이 있었던 것이다. 마을공동체가 살아 있었다. ‘자발적 가난’이니 ‘인간의 존엄성’이니 하는 거창한 말이 필요치 않다. ‘지금 여기’에서 나눌 수 있을 때 그냥 나누면 되는 것이다.

야구장에서 빈 깡통을 줍던 송 할아버지가 내게로 왔고, 야구장에 하나의 식탁이 더 차려졌을 뿐이다. 이제는 야구장에 갈 때마다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의 식탁에서 만나는 일이 자연스런 일이 되었다. 손을 맞잡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김밥을 나누어 먹고 함께 차도 마신다. 웃으며 헤어진 뒤에는 내적인 충만함이 차오른다. 야구경기장 밤하늘에 부는 바람은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시원함을 준다. 그것도 끊임없이 그저 준다.
 

최충언 플라치도
외과의사.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단팥빵-어느 외과의사의 하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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