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방촌 엘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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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촌 엘레지
  • 최충언
  • 승인 2016.06.2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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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언 칼럼] 

헐벗고 외롭고 술 취한 이들
가난한 나그네와 병든 이들이
쉬어 간 자리, 먹고 간 자리
영등포역 앞 어둑한 골목
요셉의원 안에는 자유가 있네.
지친 몸들을 어루만져주고
더러운 영(靈)들을 억누르는 힘 있네

-조창환, ‘요셉의원’

1981년 의예과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민중가요가 수록된 조그만 노래책을 얻게 되었다. 복사를 한 조악한 핸드북이었다. 지금도 가사 전부가 기억나는 유일한 노래가 바로 <민중의 아버지>다. 노랫말에 혀 짤린 하느님, 귀먹은 하느님, 화상 당한 하느님, 쓰레기 더미에 묻혀버린 하느님이 나온다. 내게는 충격이었다.

그렇게 이 노래는 광주와 더불어 내게로 왔다. 전두환 군부독재시절 징역을 살 때도 독방에서 자주 불렀다. 외과전문의가 되어 화상환자의 얼굴을 날마다 마주칠 때,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느님을 기억해내곤 했다. 쪽방상담소나 부산역 주변의 노숙자를 볼 때마다 쓰레기 더미에 묻힌 가엾은 하느님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 땅의 가난하고, 힘없고, 장애를 가지고, 노숙을 하는 그들이 민중의 아버지였다.

요셉의원 경당 창 너머에 보이는 쪽방촌. ⓒ한상봉

그 친구가 예수처럼 보였다

지난 해 알게 된 친구가 있다. 그는 개신교 전도사면서 사회복지사다. 쪽방상담소에서 팀장을 맡고 있다. 믿음을 현장에서 실천하는 친구다. 언젠가 그와 함께 자정 무렵에 부산역에 간 일이 있다. 종이박스를 이불삼아 바닥에서 쪽잠을 자는 노숙자들이 안녕하신 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럼없이 그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이 분은 어떤 분이고, 저 분의 이름은 무엇이며, 또 다른 분은 쪽방상담소에서 잘 아는 사람이며 조현병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그와 부산역을 둘러보고 온 날도 충격이었다. 같은 하늘에 아래 사는 데 우리가 너무 무관심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나에게는 그 친구가 예수처럼 보였다.

현대인들은 SNS를 통해 소통한다. 유월 이렛날이었다. 페이스북에 그 친구가 글을 올렸다.

부산 동구 수정2동 여인숙 사시던 쪽방 아저씨...
지난주부터 부산의료원 중환자실서 계시다가 금일 새벽 1시경에 소천하셨습니다.
가시는 길에 하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박ㅇㅇ 어르신 잘 가세요.
당신의 삶을, 이름을, 민들레처럼 사신 그 길을, 그 방을 기억하겠습니다.

박씨도 알코올중독자였다. 사고가 났던 날도 박씨는 막걸리를 마시고 다리에 힘이 없어 넘어졌는데 불행히도 머리를 다쳤다. 사회사업실에서 긴급의료지원으로 300만원까지는 진료가능한 데 대학병원에서 수술해도 가망이 없다고 30만원 어치만 치료하고 부산의료원으로 환자를 전원시켰다고 들었다. 중환자실에서 며칠 머물다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대다수의 쪽방촌 사람들은 무력하게 절망하고 좌절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자활이 중요한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언제나 예산 타령에 날이 새기 마련이다.

선우경식 선생과 쪽방촌 이야기

부산지역에는 쪽방상담소가 두 군데 있다. 동구 쪽방상담소와 진구 쪽방상담소다. 쪽방상담자들이 각각의 상담소에 500명씩 해서 천 명 가량 된다고 한다. 1평에서 1평반 정도의 좁은 공간이지만 먹을 수 있고, 씻을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는 쪽방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 노숙자들일 것이다. 쪽방은 노숙 직전의 보증금 없는 사글세방을 말한다. 부산에도 노숙인 시설 등록자가 5-600명이고, 현장 노숙인은 130여명으로 추산한다. 노숙인 현장센터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의 말에 따르면, 부산전역에 노숙자들이 잠을 청하는 곳이 대략 스물다섯 곳이라고 한다.

선우경식 원장

쪽방촌은 나에게 요셉의원과 같은 말이다. 서울 영등포역 부근 행려자, 노숙자, 알코올 중독자, 미등록 이주노동자와 같이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거나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던 병원이 바로 요셉의원이었다. 고 선우경식(요셉) 원장님과 영등포 쪽방촌을 둘러 봤던 일이 언제나 기억나기 때문이다.

2004년 늦가을, 외과 추계학술대회 참석하러 서울에 갔다가 요셉의원에 들른 적이 있다. 선생님은 나에게 요셉의원을 구석구석 소개해 주시고 주변의 쪽방이야기를 해 주셨다. 현대식 거대한 영등포역사와 이웃한 초라한 쪽방의 비대칭성에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알코올중독자가 많아서 선생님께서 일본에서 배워 오셨다는 단주동맹의 모임도 인상적이었다.

“최선생님, 서울에 오시면 언제든지 요셉의원으로 오세요. 잠자리가 많아요.”

다정하게 말씀해 주시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나의 숙소를 물으면서 했던 말이다. 검소함이 몸에 배인 선생님이셨다. 지금은 선생님 진료실에서 찍은 사진 한 장만 추억으로 남아 있다.

2005년 봄에는 선생님이 부산에 오셨다. 마침 부산 사하구 장림동에 행려자들을 위한 시설인 <마리아 구호소> 개소식에 참석차 오셨다. 행사를 마친 뒤, 내가 일하고 있던 무료병원인 마리아수녀회 구호병원에 갔다. 병원을 쭉 둘러보고는 이런 병원이 좀 더 많이 생기면 우리나라는 의료의 천국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단팥빵>에서 이렇게 적었다. 의료의 공공성, 교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의 대형화 문제, 쪽방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선생님과 나누면서 나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체화된 사랑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선생님은 사랑을 피부로 느끼게 해주셨던 분이었다.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사랑을 느끼게 해주어야만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지 않는가.

영등포역 인근의 쪽방촌. ⓒ한상봉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제발 조금..."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 이야기

요셉의원을 돕는 잡지인 <착한이웃>이란 책에서 본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1751-1820)에 관한 일화 한 토막이 기억에 떠오른다.

성인은 날이면 날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구걸을 하고 다녔다. 어느 날 한 식당에서 모자를 들고 이 식탁 저 식탁을 돌면서 돈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교회가 하는 일이라면 쌍수를 들고 반대하고 교회를 증오하며 사는 한 남자 앞에 서게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남자에게도 한 푼의 돈을 청하였다. 그러자 그 남자는 “감히 나한테 와서 구걸을 하다니!” 하고 고함을 지르며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욕에도 굴하지 않고 침착하게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고는 다시 겸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이건 저에게 주신 선물이고, 이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제발 조금 보태주십시오.” 그러고는 다시 모자를 내밀었다. 그러한 그의 태도에 놀란 그 남자는 자기가 가진 돈을 모두 꺼내 모자 속에 넣었다고 한다.

쪽방 박씨 아저씨의 부고를 듣고, 마산에서 볼 일을 마치고 밤에 부산의료원으로 갔다. 빈소도 없었고 영안실에 계셨다. 그 친구의 말로는 이런 경우는 바로 화장을 한다고 했다. 문제가 생겼다. 사망진단서에 외인사로 적힌 것이 발목을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경찰에서 사인을 규명하여 결국 돌아가신 지 여드레 만에 영락공원에서 구청이 정한 장례업체에서 화장을 했다.

그 친구에게서 유골함을 든 사진과 함께 문자가 왔다.
“방금 직접 납골하고 복귀했습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런 선한 사마리아인이 있을까? 네가 있어서 먼 길 떠나는 박씨 아저씨도 외롭지 않았을 거야’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고생했다. 고맙대이~” 답신문자를 보냈다.

영락공원 1동 2실 3400호. 한 줌의 재가 되어 그가 누운 곳이다. 지난 주일에 영락공원을 찾았다. 사진 한 장 없이 납골당 가장 높은 곳에 박ㅇㅇ 이름 석 자만 적혀 있었다. 사진이라도 붙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인간에 대한 예의를 묵상한다. 


최충언 플라치도
외과의사.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단팥빵-어느 외과의사의 하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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