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어디서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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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어디서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자유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2.13 15: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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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와 요한의 복음서-8

요한이 그의 복음서의 더 심오한 메시지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잘 구성된 대화 형식이다. 종종 사람들이 질문을 하러 예수님께 오면 그분은 그들을 대화로 끌어들이신다.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예수님은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의미를 들어낼 수 있는 깊이 있는 대화로 이끌어 가시는데, 복음서 독자들도 여기에 깊이 들어오도록 초대된다.

예를들어 제3장에서 니고데모라는 유다인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을 알게되는 것이 두려워서 밤에 몰래 그분을 찾아간다. 몇 마디를 나누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그에게 말씀하신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묻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새로 태어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요한 3,5-7)

우리는 예수님께서 육체적이 아닌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에 관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말씀하신 것을 설명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신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요한 3,8)

세속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은 예측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른면에서 보면 완전히 예측 가능하다. 그들은 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한다. 그들은 사회적 법규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치 않고 분명히 선한 것을 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자녀들이 갖는 자유이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오래된 타성에 너무도 안주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활 방법에 너무나 편안해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여러면에서 그들은 다음 대화에 나오는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여인과 비슷하다. 그녀는 삶에서 무언가를 더 얻고 싶어하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생명의 물”을 말씀하신다. 또다른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어떻게 그것을 샘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분은 대답하신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요한 4,13b-14)

예수께서는 이 여인에게 아주 새롭고, 전혀 다른 무엇인가를 제안하신다. 그분은 그녀에게 밖으로부터 흥분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힘을 지닌 생명을 제안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교회나 그외의 다른 곳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자유를 이야기하신다. 그분은 그녀가 자신이 알고 있는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신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여인도 예수님께서 어디로 그녀를 이끌어 가시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들 모두가 해야하는 것처럼, 자신을 내어 주어 주님이 이끌게 하시고 주님 앞에서 아주 순종적이고 나약해진다. 그녀가 머뭇거리면,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인정할 때 받는 성령의 자유라는 주제로 그녀를 부드럽게 불러 들이신다. 그분은 그녀의 환상, 의존성, 속물 근성을 버릴 수 있는 존재의 더 깊은 곳으로 부르신다. 그분은 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면서 그녀에게 계속해서 더 요구하신다.

우리는 종종 사랑에 요구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망각한다. 사랑은 그저 인정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정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의 천박함에서 나와 그들의 심연에 닿을 수 있도록 불러내는 모험을 감행한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도전하고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불러낸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자신들 보다 더 나은 자신들이 되기를 원하고, 우리가 성장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며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나아가는 우리를 지원해준다. 예수님의 사랑에도 이런 요구적인 측면이 있다.

제 6장에 이런 사랑의 적절한 예가 있다. 예수님은 절름발이 옆을 지나가면서 그를 측은하게 생각하셨지만 즉석에서 그를 고쳐 주지 않으셨다. 대신에 그에게 '낫기를 원하는가' 물으신 후 그가 '그렇다고' 대답을 한 후에야 주님께서는 그를 고치신다.

우리는 종종 건강에 해로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불구상태에 안주하기를 원한다. 우리자신의 방어수단과 환상을 갖고 사는 것이 그것들을 내어 던지고 새로운 삶의 요구와 직면하는 것보다 더 쉽다. 우리는 치유되기보다는 동정 받기를 더 원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상태로 버려 두시기를 원하지 않으시나, 우리의 동의 없이는 치유하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그분의 요구하시는 사랑에 “예”라고 대답하고 우리를 온전히 맡겨 죄에서 은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도록 해야한다. 그렇게 할 때 모든 것이 그분의 은총에 찬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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