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성서, 모든 영감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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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회] 성서, 모든 영감의 원천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2.07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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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7

중세에는 <시편>에 성서와 같이, 행간과 여유 있는 여백들에 더 작은 문자로 씌여진 설명기록과 교부의 해설로 이루어진 주석이 달려 있었다.

12세기에 어떠했을까를 상상하면서 오늘날 또다른 미국의 시토 수도자는 ‘성서전체가 부활초의 빛으로 비쳐지는 것’을 볼 때까지 ‘해석적인 설명이 붙은 시편들이 수도승들을 완전한 파노라마 같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몰입하게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수도승의 특히 빼어난 책인 성서전체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이런 신비에 몰입하게 했다. 그는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들 중의 하나인 성서를 쉽고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그는 성서가 간직한 신비,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신비에 기뻐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주는 중요한 것이었다. 이것이 어떻게-오랜동안의 고독의 독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례와 교부들과의 만남을 통하여-발생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매일 성무일도에 많은 시간을 쓰고 더구나 이것이 그들의 영성형성에 중요한 부분이므로 엄격하게 지켜지는 것을 생각할 때 전례력의 독서 주기에 따라 성서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전례력을 따름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의 삶의 중요한 사건들을 따랐는데, 이는 어떤 신심적인 형식이나 오랜 관습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의 구원 의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탄생에서 수난까지 해마다 그들은 우리의 구원이 하느님이며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을 통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되새긴다.

그분은 이해할 수 없고 근접할 수 없고,
볼 수 없고 전혀 생각할 수 없다.
이제 그분은 이해되기를 바라고,
보여지기를 바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신다.
어떻게, 당신은 질문하는가?
구유에 누워 계심으로써
성모의 무릎에서 쉬고,
산 위에서 가르치고,
밤을 새워 기도하고,
혹은 십자가에 매달리고,
죽음으로 창백해져 가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 자유로워져 지옥을 다스리고,
그리고 또한 셋째날에 일어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승리의 표시인
못자국을 보여 주고,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의 비밀 위로 올라가심으로써.

그들은 늘 교회를 사로잡았던 일들에 대해 성서에서 빛을 찾았다: 육화와 구원의 위대한 교리는 토마스 머튼이 말한대로, 바로 계시의 중심에 있고 그것은 모든 인간의 불가결한 문제들과 도덕적인 실존에 대한 열쇠이다. 그들은 미묘하고, 흥미진진한 성서 본문상의 문제들을 추적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앙드레 루프는 시토 수도회의 신학과 학문적인 신학과의 구별이 더 예술적, 직관적, 통합적인 사고의 우뇌와,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의 좌뇌가 가진 차이에 비추어 설명될 수 있다고 썼다.

아담이라고 하는 한 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호이랜드의 길버트는 그를 학술적인 학문에서 떼어놓으려고 노력을 했는데, 학술적인 것들을 쓸데없고, 뒤쫓는 그림자들일 뿐이며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논의에 의해 왜곡’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신에 우리가 ‘베일에 싸인 신비한 의미들’로 돌아가서 변화되고 새로운 인간으로 바뀌어, ‘하느님의 지혜의 모든 보물들이 숨겨진, 그리스도의 마음 속에 곧바로 이르게 되기를’ 바랬다.

성서는 그들에게 있어 거의 성사적인 의미가 되었다. 그 ‘문자’라는 외형상의 모습에 숨겨진 것은 깊은 은총이며 하느님 자신에 의해 그곳에 심어진 것이다. 리보의 알레드가 임종의 자리에 누웠을 때 자신의 둘레에 이십명이나 삼십명의 수도승들을 모아서, 침대 옆에서 ‘성서에 대한 영적인 기쁨’을 논의하였다고 월터 다니엘은 우리에게 말한다.

"시토 수도자의 접근은 인간의 어리석음에 반하여 하느님의 지혜를 주제로 하는, 성서의 지혜전통이 했던 접근이다. 지혜는 만들어진 만물의 기초이고, 교회인 하느님 도시의 기초이다. 지혜는 만물을 배정하신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그가 땅의 터전을 잡으실 때, 나는 붙어 다니며 조수 노릇을 했다. 언제나 그의 옆에서 뛰놀며 날마다 그를 기쁘시게 해 드렸다. 나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 즐거워 그가 만드신 땅 위에서 뛰놀았다.’(잠언 8,30)

이것은 이미지와 상징에 주어진 역할 속에서, 서로 관련되어 아름답고 상상적이고 시적이며 재미있는 것이다. 베르나르드는 모든 지혜의 상징들을 사용한다: 빵, 물, 향기, 과일들, 생명의 나무, 샘, 보석들 그리고 지혜에 대한 그의 태도는 매우 전통적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해석을 첨가하는데, 자신의 지식과 사랑의 열매 그리고 이에 못지 않은 자신의 경험을, 특히 수도원장으로서의 경험을 그는 양육하는 어머니의 역할로 묘사한다.

그것은 우리를 가르치고, 계속 이끌고, 우리에게 하느님의 창조물과 하느님 자신을 사랑하도록 도와줌으로써, 마치 그 자신이 지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과 거의 같다. ‘어머니는 인간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이끈다.’"

시토수도회 작가들은 성서를 무척이나 많이 그들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것의 반은 성서의 인용문이다. 초기의 다른 모든 수도 작가들과 같이 그들은 성서에 너무나 몰두하여서 실제적으로 예언자들과 복음사가들이 했던 것처럼 생각하였다.

우리는 특히 베르나르드 자신의 경우에서 이런 현상을 명확히 볼 수 있는데, 그의 내적인 존재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 말과 이미지는 모두 성서에 젖어들었다. 마이클 캐이시는 베르나르드의 아가서에 대한 강론이 매 두 행마다 하나의 성서를 인용하였다고 평가하였고, 베르나르드 자신은 그가 성서를 인용할 때 말의 기억이 아니라 오히려 그 구절의 일반적인 의미의 기억에 의존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 대로, 성서 본문을 인용하고, 그런 다음 그것이 복음에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본문을 왜곡할 의도가 없었지만 나는 그 구절의 일반적인 의미에 대한 나의 기억에 의존하였고 그것이 말씀에 대한 사소한 오해를 만들었다."

성서는 명확히 모든 12세기 시토 수도회 작가들에게 영감의 주요 원천이었고, 그리고 어디에서 성서가 끝나고 어디에서 그들 자신의 저술이 시작되는지 결정하기가 자주 어렵거나 불가능했다. 그것은 마치 성서라는 잉크에 펜을 담그어 쓴 것과 같았고, 또한 그들은 비록 의미는 전적으로 자신들의 것이어도 성서 구절로만 짜여진 묵상집을 만들었다.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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