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하느님 영광을 위해 조용하게 단순하게
상태바
[시토회] 하느님 영광을 위해 조용하게 단순하게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3.06 11: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11

"단순함의 정신: 시토수도회의 특징", 이것은 1948년 총회에서 발간된 공식 보고서의 제목이며, 세인트 티어리의 윌리암 서거 800주기에 그에게 바쳐졌다. “단순함의 정신”이라는 이 간결한 구절은 앞의 페이지들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을 매우 명확히 요약하고 있다:

"단순함은 시토 수도자의 삶의 열쇠이다. 시토 수도자의 이상은 완전한 단순함과 일상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십이 세기 시토 수도자들의 삶은 첫 번째 수도승들에게 “단순함으로부터 오는 모든 여유와 숨 돌릴 틈을 보증했는데,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하느님에게 일치시킬 수 있기 위해서였다.”(보고서로부터 인용된 말들)

수도승이 불필요하고 과도한 것을 자신에게서 제거하는 법을 배울수록 그는 내적인 단순함으로 더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은 수많은 기만적인 형태의 성취와 획득이 지배하는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크리소고너스 와델은, 파리대학을 떠나 클레르보의 공동체에 합류하면서 상상력이 풍부한 젊은 수련자 에르나우트가 단순함이란 소박하고도 비천한 구원의 섭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발견하는지 서술하면서 이 점을 지적한다:

‘가장 평범한 물질들, 빵, 술, 물, 기름을 포함하는 성사체계; 그가 파리에서 배운 버질이나 호르티우스와 비교하여 어색한 라틴어로 쓰여진 성서들; 다성음악을 허용하지 않았던 전례음악; 오직 농노들이 했던 들일과 손노동’.

이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조용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평범한 일들을 하는 것으로, 그것은 순수한 베네딕도 삶의 아름다움이고, 아름답고 단순한 열망이며, 수도원의 참된 주춧돌’이라고 머튼이 수도생활의 단순함을 묘사했을 때 의미하였던 것이다.

사진출처=ocso.org/

1948년 머튼은, 수도생활에 비교적 신참자였지만 언어에 대한 재능 때문에 총회 보고서를 번역하도록 소임을 받았다. 그는 보고서가 건축, 전례, 의복들의 외적인 차원에서 단순함을 다루는 것으로 느꼈기 때문에 아주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긴 부록, <내적인 단순함의 성 베르나르드>를 덧붙였는데, 여기서 그는 가장 중요한 베르나르드 원문들 중의 네 개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시작은 내적인 단순함이어야 한다: ‘당신 마음의 단순함 속에서 그분을 찾아라’, 왜냐하면 베르나르드가 우리에게 말하듯이, 이것은 하느님의 완전히 단순한 본성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승은 단일성, 단순함의 사람이다: 그의 이름 자체가 그것을 말한다, 동정성: 홀로, 하나로, 단순한."

수도승의 소원은 자신을 ‘하느님께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머튼이 말했을 때 그는 내가 특히 좋아하는 구절을 사용하였다. 머튼의 부록 두 번째 부분은 성 베르나르드에 관한 토마스 머튼에서 ‘내적인 단순함의 성 베르나르드’라는 제목으로 나타난다. 일치의 부족이란 대립적인 이해와 욕망에 의해 갈라져 찢어짐을 의미하는데, 우리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위험하다.

다양성, 복합성은 둘 다 수도생활의 단순함에 반대된다. 하느님과 평화롭게 지낼 때까지, 아무도 그들 자신들의 자아나 서로가 평화롭게 지낼 수 없다; 이것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이 달려 있는 수도회의 고요함이다. “Tranquillus Deus tranquillat omnia.” 베르나르드는 몇 마디로 이를 단순히 요약한다: ‘고요하신 하느님은 우리 안의 모든 것을 고요하게 하신다.’

세인트 티어리의 윌리암은 그것을 전 장의 인용구절에서 매우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영이 무질서한 사람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비록 홀로 있을 때도 그는 소란한 군중들 한 가운데에 항상 있다.” 일치를 위한 절실한 필요는 우리 모두가 인식하는 중요한 것이다. 헨리 나웬이 제네시 수도원에서 시간을 보낸 주요 이유들 중의 하나는 정확히 이것이었다. 수도원에서 2주일 조금 더 지냈을 때인 7월 20일자 일기에서 그는 썼다:

“지난 3년간의 내 일을 성찰하면서 나는 거기에 일치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갈수록 실감하게 된다. 내가 이 3년 동안 했던 수많은 일들은 실제로 서로 연관이 없고 하나의 원천에서 오지도 않아 하나하나 떨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그간 특정한 시간들 또는 특정한 날들에 기도를 했지만 내 기도는 내가 행한 강의들, 내가 한 여행들, 내가 제시한 충고들과 유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지난 3년간 누적된 피로와 두려움은 족히 한결같음의 부족으로, 올곧음의 부족으로, 단순함의 부족으로 진단될 것이다. 사실 이제까지 내 마음은 대단히 분열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리자면 ‘한 가지를 바라는 것’이 성인의 특징이다. 그런데 나는 한 가지 것 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고 표리부동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고 충실성도 대단한 분열상을 보이고 있다.”

9월에 여전히 분열된 자아와 싸우며 올곧은 눈과 마음이 되고자 하는 소망으로 씨름하고 있을 때, 그는 “이 모든 것이 전제되는 단순함은 얻기 쉽지 않다. 나는 나의 삶이 복잡하고 분열될 것이라는 위협을 부단히 받고 있음을 안다. 기도의 삶은 기본적으로 대단히 단순한 삶이다. 하지만 이 단순함은 고행과 노력의 결과이다; 그것은 자연발생적인 단순함이 아니다”라고 인정하였다.

그는 그의 소망이 단순한 삶을 사는 것이고 그렇게 하여 강론과 교육, 강의와 충고가 명상적인 삶의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어 말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모든 것이 흘러나올 수 있는 어떤 중심을 찾고 있었다. 그는 수도원에 있을 때 이것을 명확히 볼 수 있었지만, 수도원을 떠나 ‘파편화 되었고 파편화 되어가는 세계’로 되돌아 갈 때에도 이 갈망을 붙잡을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고 얼굴을 찌푸리며 말할 만큼 정직하다.

사진출처=handcrafted.trappisturns.com

자서전 <칠층산>에서 우리가 만나는 젊은 시절의 토마스 머튼에게서, 우리는 이 같은 일치의 부족, 어떤 새로운 것을 끝없이 추구하고, 새로운 역할들, 새로운 장소들, 새로운 경험들을 찾고 있는 방랑자를 본다. 그의 후기 저작들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같이 있고 하나의 중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통합적인 단순함의 성장을 보도록 허용한다.

그는 결코 예술가는 아니었지만, 관상의 도구로서 카메라를 사용하였고 그의 사진들은 그가 세상을 보았던 방법에 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처음 카메라를 빌렸을 때 그는 마음을 빼앗겨 거의 카메라에 어린이 같은 흥미를 보였고,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들을 다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는 매우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물들의 중심을 꿰뚫어 보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창조된 사물들의 내적 본성 속에 스스로 신비롭게 숨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그래서 그가 크게 빚을 지고 있었던 그리스의 교부, 막시무스를 인용하였다. 그래서 “다양한 모든 것 안에 하나이신 그분이 감추어져 있고 모든 혼합되는 사물들 안에 그분은 영원히 동일한 존재로 계신다”고 말한다. 이것은 눈과 마음이 열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였다.

자주 되풀이하여 머튼은 “그것은 모두 주어질 뿐이다” “눈을 열고 보아라” “애쓰지 말고, 주의깊게 기다려라”라고 말할 것이다. 바위, 오래된 담장, 뿌리 등, 무엇이든지 바로 눈앞에 실제로 있는 사물들이 자신들의 현존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라는 그의 주장에는 거의 선(禪)과 같은 것이 있다:

만물 안에 있다
고갈되지 않는 단맛과 순수함이,
행동과 즐거움의 샘인 침묵.
그것은 무언의 온화함으로부터 솟아나서
그리고 나에게로 흘러 나온다
모든 창조된 존재의 보이지 않는 뿌리로부터,
다정하게 나를 환영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겸손함으로 나에게 인사하면서.

머튼이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도록 도와준 것들 중의 하나가 일탈에 관한 수도회적인 이해였는데, 그것은 무귀속(無歸屬)이란 말로 아마 더 잘 표현된다. 이것은 소유나 통제를 원하지 않고, 만물(그리고 물론 사람들을 포함한 만물)의 내적 신비를 보며, 각각의 사물이 그 자체일 수 있도록 놓아두기 위해 뒤로 물러난다는 의미이다. 침묵의 삶에서 머튼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그것들을 우리자신들에게 데려오자마자,
그것들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우리 가슴으로 껴안는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그것들을 훔쳤다,
그것들은 더 이상 그분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다.“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