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하느님의 눈 안에서 행하는 렉시오 디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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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회] 하느님의 눈 안에서 행하는 렉시오 디비나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2.2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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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10

마치 말씀 안에 우리 자신을 감싸고 있을 때까지 성서의 거룩한 구절들 속에 애정 깊게 골몰하는 것은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라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번역을 하면 잃게 되는 특별한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계속 쓰여지는 라틴어 구절이다. 이것은 느리고, 주의 깊고, 기도로 가득 채워진 독서인데, 무엇보다도 시간이 걸린다.

알레드는 이것을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정과 훌륭하게 비교하는데, 마치 우정이 낯선 사람과의 교제와 구별되듯, 또는 동료에게 베푸는 호의가 평상시의 인사와 다르듯, 부지런히 읽어야 하고, 그리고 ‘부지런한 독서는 피상적인 통독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고 있다.

거룩한 독서는 처음에는 단순한 소리일 수 있지만 사실 깊고도 풍요롭다. 그것은 단순히 영적 독서가 아니라, 오늘 사용되는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을 직접 주시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불린다. 그것은 하느님에 관해서 읽는 문제가 아니다; 하느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중재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독특하게 말씀하시고 부르신다.

lectio라는 단어는 원래 큰 소리로 하는 독서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는데, 수도승들이 큰 소리로 읽는 그 구절을 자신들이 들을 수 있도록, 혹은 낮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수도원에서 자신들에게 큰 소리로 읽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방법으로 하는 독서는 듣기를 포함한 신체적인 행동이었고, 따라서 사람을 전체로 더 완전히 참여시킨다. 그들은 개인 독서 시간에 그 말씀들을 웅얼거리면서, 그 말씀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내면화시킨다. 바실 페닝톤은 후두염 때문에 며칠동안 자신의 lectio를 할 수 없었던 가경자(可敬者) 베드로의 편지를 그가 처음 읽을 때 얼마나 웃었는지 우리에게 말해준다!

사진출처=minimalissimo.com

거룩한 독서의 네 단계

네 단계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lectio(크게 읽음)는 meditatio(명상), oratio(강론)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comtemplatio(관상)에 이르게 된다.

만일 어찌되었든 거룩한 독서가 기술이나 방법을 의미한다면, 혹은 어떤 목적이나 목표에 이르는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잘못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lectio에서 활동중인 힘은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속해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시작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분이 우리 각자를 위해 주시는 그날의 선물을 놓칠지 모른다:

‘그분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그래서 시작은 성서의 어느 부분부터 천천히 읽는 것인데(나의 경우 그것은 거의 항상 그날의 시편들이다), 그 말씀과 함께 머물며, 어쩌면 크게 말씀을 말하면서, 그 말씀을 마치 처음으로 듣는 것처럼 노력하면서 천천히 읽는다. 어떤 특정한 구절, 어떤 작은 구절에 사로 잡혔을 때, 나는 여러번 반복해서 그 구절을 읽는다. 이것은 곰곰이 생각하고 되씹어서 양분을 받는, 초기 교부들이 반추하는 것이라고 즐겨 표현했던 방법이다.

나는 내 자신의 삶으로부터 유추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잠들라고 작은 아기를 살살 흔들기, 혹은 보다 덜 낭만적으로 세탁기의 스위치를 넣었을 때 옷들이 빙빙 돌아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기. 내가 성서구절을 되풀이 말할 때에 그것은 오히려 심장의 고동과 같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때가 세 번째 단계인, oratio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를 지성과 상상을 넘어 이끌며 느낌과 감정이 작용하는 곳이다.

지금은 마치 내가 드디어 하느님께서 돌보시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과 같고, 그분께 열려져 그분의 사랑이 나를 잡을 수 있고, 그분자신에게로 나를 이끄실 수 있는 것 같다. 모든 다른 것은 다 떨어져 나갔고 나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승복한다. 그것에 대해 많이 쓸 수 없는 것이 애석하데, 그건 무엇보다도 사랑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자신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잃어버려진 것과 같다; 우리는 하느님을 단순히 응시하고 있고, 그분 속에 쉬고 있다.

위대한 베네딕도 회원인, 돔 콜롬바 마르미옹은 이 모든 것들을 한데 아울러 다음과 같이 매력 있게 표현한다. 우리는 독서(lectio)한다, 하느님의 눈 아래에서. 묵상(meditatio)을 한다, 마음에 와 닿을 때까지. 강론(oratio)을 한다, 그리고 불꽃 속으로 뛰어든다(contemplatio). 카르투시안 수도회 수사인 귀고는 일련의 질문들 속에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이미지들을 주고 있다:

"당신은 작은 한송이 포도에서 얼마나 많은 과즙이 나오는지 보지 않는가?
혹은 섬광에서 얼마나 큰불이 붙는 것을?
혹은 모루 위의 해머질로
이 작은 쇠조각이 얼마나 새로운 차원이 되어가는가를?"

사진출처=ocso.org

주의 깊은 '관상'이란

오늘날 관상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광범위하게 쓰여지고 있어 유행어가 되거나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릴 수 있는 진짜 위험에 처해 있다. 원래의 의미의 충만함을 다시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사전은 우리에게 관상이란 ‘어떤 것을 주의 깊게 응시함’이라는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말의 뿌리는 사제들, 점쟁이들이 신의 뜻과 목적을 찾기 위해서 ‘동물의 내면, 사물의 내면’을 보는 따로 분할되거나 떨어져 있는 거룩한 공간(templum)이다.

이것을 나는 내 존재의 원천과 근거를 발견하기 위해 내 자신의 자아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는 의미로 번역한다. 주의 깊음, 밤샘, 지켜보기의 관념을 다시 생각해 보는데, 이것들은 수도생활의 시작을 가져온 특징들이고 시간이 걸리며 계속 형성되어온 특징들이다.

말씀은 사려 깊은 마음 속에 받아들여진다. 천천히, 그리고 연습에 의해서, 이것은 장차 자신 안에 몰두하게 되는 상황이 될 것이다. Memoria, 곧 주의 깊음은 oblivio, 곧 마음의 마비인 경솔함의 반대이며, 이 경솔함은 물론 회피하고 길을 벗어날 수 있는 편안한 일상을 포함하고 있다.

알레드는 ‘어떤 망각의 흔적도 없이’ 혹은 ‘어떤 지친 느낌도 없이’ 하느님께 밀착되는 것에 대해 말하였다. 호이랜드의 길버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 중에 하나가 조용한 마음, 고요 속의 마음, 쓸데없는 행동으로부터의 자유이고, 영혼을 해명하는데 몰두하여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는 단 하나의 필수적인 일은 말씀이 수도승의 삶과 경험에서 실현되는 것이며, 이것은 ‘기억에 저장하고, 당신의 양분을 위해 확실하고, 당신의 만족을 위해 풍부하고’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항구히 붙잡고 주의깊게 깨어있는 것이라고 알았다. 세인트 티어리의 윌리암은 재치있는 라틴어 작은 어구로 그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ut agatur in nobis quod legitur in nobis:
우리가 읽은 것이 우리 안에서 깨달아질 수 있기를"

시토 수도자의 경험에 일치를 가져왔던 것은 바로 말씀이다. 그들의 삶은 말씀의 둘레에서 조직되었다.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음향적 환경으로 된 건축자체는 말씀이 최대한의 영향을 주도록 설계되었다. 성무일도의 독서와 식사동안 식당에서 큰 소리로 읽는 독서, 그리고 개인적인 거룩한 독서 사이에 연속성이 있었다. 그들이 하는 대부분의 일은 마음의 침묵 속에서 묵상하거나 기도하도록 자유롭게 해 주었다.

한 사람의 자아, 육체, 마음과 영혼 전체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리듬 속에서, 각각의 행위는 다음으로 흘러가고, 어느 행위 하나가 다른 하나에 매우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말씀과의 다양한 접촉에 있어 그 강렬함의 정도에 차이가 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합창 속에 들리는 말씀은 언제나 어디서나 전달되었다. 숲에서 명상하는 영혼이 성서의 숨겨진 의미들을 수도원의 필사실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뭇가지들과 둥근 돌들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베르나르드의 잘 알려진 격언이었다.

따라서, 비록 이론에서는 다른 영적인 행위들을 구별하고, 그 행위들을 독서, 명상, 기도나 관상으로 이름 붙일 수 있을지라도, 사실 실천에서는 수도승들이 이 삶에 더 오래 머물수록, 어떤 유형의 고립을 만들게 되기는 더 어려워진다. 그 삶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중심을 둔 일치였다.

이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는 것, 사는 것이다. 정신과 마음은 그리스도에 의해 양성되고, 행위는 그리스도에 의해 형성된다. 수도원은 그리스도를 배우는 학교이다. 왜냐하면 시토 수도자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정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진실인데,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한 인격을 만나리라는 사실이다. 스텔라의 이삭은 강론을 끝맺는다:

그러므로, 형제여, 그리스도가 너희의 유일한 주인이 되도록 하라.
그분이 당신을 위해 속에서 겉에서 씌여진 책이 되게 하라.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읽어라.
그것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배워라.
이 원본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복사본을 만들라.
내적으로 너의 마음에서,
그리고 외적으로 너의 몸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의 방법을 너의 삶에서 읽도록 하라.
이것이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까닭이다.
‘당신의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을 지니십시오.’(1코린 6,20)
그리스도 그분자신이 친절하셔서 이 선물을 주시기를.
아멘.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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