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낯선 분] '결코'와 '항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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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낯선 분] '결코'와 '항상' 사이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6.11.15 1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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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 4
돌아온 탕자(Rembrandt,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9, The Hermitage, St. Petersbur, Russia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후반부가 시작되는 루카 15,25에서 마침내 큰 아들이 등장한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로 다시 돌아왔을 때 큰 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는 집 가까이에서 잔치 소리를 “들었다.” 그저 그는 잔치 소리를 들을 뿐이다. 26절에서 큰 아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와 아버지의 집 사이에는 하나의 경계가 존재한다. 그 경계는 큰 아들 자신이 설정한 것이다. 이것은 큰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큰 아들과 작은 아들 사이의 경계이기도 한다. 그는 오히려 하인 하나를 불러 질문한다. 그러자 27절에서 하인은 “당신의 아우님이 오셨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인은 작은 아들을 큰 아들의 “아우”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8절의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큰 아들의 분노는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그 분노는 집에 들어가기를 거절함으로써 표현된다. 큰 아들이 설정한 다양한 경계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큰 아들의 질투와 공격성이 드러난다. 그는 아버지와 작은 아들 사이의 관계 회복의 기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집에서 나와 큰 아들을 타이른다. 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행동은 작은 아들에 대한 자비로운 태도와 다르지 않다. 동사 “타이르다”는 루카 3,18; 사도 14,22에서 “권고하다”, “격려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루카 7,4; 8,31에서는 “간청하다”, 루카 16,25; 사도 20,2 “위로하다”의 뜻으로 해석된다. 우리 비유에서는 “간청하다”의 의미가 적절하다. 왜냐하면 29절에서 큰 아들은 아버지의 간청에 대해 대답한다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처럼 섬긴다”라고 말한다. 이 동사는 현재 시제인데, 이것은 큰 아들이 여전히 종으로 느낀다는 것을 표현한다. 여기서 큰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백히 드러난다. 즉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올바른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큰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는 것과 아버지가 자신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준 적이 없다는 점을 언급한다.

큰 아들은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다. 그는 현재 집 안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함께 참여하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큰 아들은 실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무능하다. 그래서 그는 “한번도, 결코”라는 부정적인 부사가 두 번이나 사용한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작은 아들의 관계 회복을 질투하고,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그 어떤 혜택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부사는 31절에 아버지의 말에서 사용된 긍정적인 부사인 “항상”과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30절에서 큰 아들은 자신의 동생을 아버지에게 “이 아우”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표현한다. 큰 아들은 자신의 동생을 배제하는 경계를 설정한다. 앞선 27절에서 언급된 하인의 말한 표현인 “당신의 아우님”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여기서 큰 아들의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뿐 아니라 형제간의 올바른 관계도 파괴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31절에서 큰 아들을 “얘야”라고 부른다. 이 애정 어린 호칭은 그를 아들로 인정하는 의미이다. 종이 되려했던 작은 아들을 아들로서 받아들였던 아버지는 이제 종처럼 느끼는 큰 아들을 또한 아들로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큰 아들은 29절에서 “한번도, 결코라는 부정적인 단어를 통해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표현한데 반해 아버지는 “항상”이라는 긍정적인 단어를 통해 자신과 큰 아들의 관계를 묘사한다. 그리고 32절에서는 작은 아들을 “너의 이 아우”로 표현한다. 아버지는 이 표현으로써 큰 아들과 작은 아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 즉 공동체를 회복시킨다. 이것은 앞선 30절의 “당신의 이 아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는 앞선 24절의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를 연상케 한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가 “잃다”와 “찾다” 동사와 함께 연결되어 나타난다. 올바른 관계의 회복과 공동체의 재형성은 기쁨으로 표현된다. 아버지의 말인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는 앞선 23절의 “먹고 즐기자”를 연상케 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루카 15,5.10에서처럼 기쁨의 모티프를 발견한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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