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낯선 분] 경계를 허물고 자비, 연민, 혹은 측은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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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낯선 분] 경계를 허물고 자비, 연민, 혹은 측은지심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6.11.07 1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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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 3

작은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루카 15,20) 여기서 “일어나”는 자신이 처했던 현실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이제 아버지와 작은 아들이 만나는 장면이 묘사된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는 문법적으로 보아 독립 소유격으로 표현된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아버지, 곧 “그의 아버지”로 소개된다. 작은 아들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았다”는 것은 아버지의 절절한 기다림을 표현한다.

아버지의 행동은 “보았다”,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로 표현된다. 특히 주목해야할 동사는 “가엾은 마음이 들다”이다.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는 표현은 동사 스플랑크니조마이의 단순과거 수동태이다. 이 동사는 사람의 “창자, 내장”를 의미하는 명사 스플랑크나와 관련 있다. 즉 속마음 깊숙이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것, 속마음이 불쌍함으로 움직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이다.

복음서에서 동사 “가엾은 마음이 들다”는 마태 9,36; 14,14; 15,32; 18,27; 20,34; 마르 1,41; 6,34; 8,2; 9,22; 루카 7,13; 10,33; 15,20 등에서 예수의 행동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의 자비(慈悲), 연민(憐憫), 혹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을 표현한다. 예수는 군중(마르 6,34; 8,2), 병자(마르 1,41), 눈먼 이(마태 20,34), 외아들을 잃은 나인 과부(루카 7,13) 등에 대하여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 비유의 “가엾은 마음이 들다”는 동사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다른 본문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이다. 루카 10,33에서 사마리아인은 초주검 당한 이를 보고서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를 끝까지 돌보아 준다. 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실천이 바로 “함께 아파하기”이다. 사제와 레위인으로 대표되는 유다인들이 분리와 배제의 에토스(ethos)를 따랐다면, 착한 사마리아인은 정결(淨潔)과 부정(不淨)의 경계,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의 경계를 허물고 그것을 뛰어 넘는다.

우리 본문 20절에 나타난 아버지의 다음 행동은 “껴안고”와 “입을 맞추었다”이다. 20절에서 묘사되는 아버지의 행동들은 작은 아들에 대한 관대함을 표현하고, 그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태도이다. 즉 용서하고 자비로운 아버지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21절에서 작은 아들은 18-19절에서 준비한 말을 아버지에게 한다. 그러나 19절의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는 반복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포기하는 말에 대해 아버지의 반응은 상반되게 나타난다. 아버지는 22절에서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반지는 권위를 의미하고 신발은 자유인의 표시이다. 여기서 옷과 반지는 잔치와 함께 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수용을 의미한다. 23절에서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그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위치를 회복시키고 잔치를 벌인다.

24절에서 아버지는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라고 한다. 여기서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나의 이 아들”이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한다. 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수용이 잘 드러난다. 동사 “잃다”와 “찾다”는 특히 루카 15장에서 6번이나 함께 사용된다. “잃은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구절은 자캐오 이야기 끝인 루카 15,6에 언급되는 예수의 말인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분리하고 배제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였다.” 자신을 떠났던 작은 아들, 다시 돌아와 종이 되려는 그를 아버지는 다시 아들로 받아들임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올바른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고 공동체를 다시 형성한다. 아버지의 이 자비는 하느님의 대자대비를 닮은 것이다. 작은 아들과 아버지의 집 사이에는 경계가 존재했다. 작은 아들은 그 집을 떠났고, 되돌아와서도 아들이 아닌 품팔이꾼이 되려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비는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이 공동체의 회복은 잔치로 표현되는 기쁨과 연결된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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