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낯선 분] 다시 아버지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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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낯선 분] 다시 아버지에게로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6.10.3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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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 2
돌아온 탕자(Rembrandt,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9, The Hermitage, St. Petersbur, Russia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시작인 11절에는 비유의 등장인물이 소개된다. 아버지와 두 아들, 즉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다. 12절에서는 작은 아들의 요구와 아버지의 반응이 묘사된다. 먼저 비유의 이야기꾼(storyteller)은 작은 아들의 말을 보여주기(showing)를 통해 소개한다.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라는 작은 아들의 요구는 매우 불손하고 무례한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라도 유산이 선물로 주어질 수 있지만, 재산의 상속에 관한 규정인 민수 27,8-11; 36,7-9; 신명 21,15-17에 따르면 아버지의 재산은 죽은 후에 상속된다. 따라서 이 작은 아들의 요구는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원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이럴 경우 아버지의 재산은 큰 아들에는 삼분의 이, 작은 아들에게 삼분의 일이 주어진다.(신명 21,17)

12절에서 사용된 “재산”과 “가산”은 동의어이다. 우리 비유의 이야기꾼은 작은 아들의 요구를 들은 아버지가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라고만 언급한다. 여기서 아버지의 관대함이 잘 드러난다. 작은 아들의 무례한 요구를 아버지는 그대로 들어준다.

13절의 표현인 “며칠 뒤에”는 루카의 작품에서 총 17번 사용되는데, 루카 21,9; 사도 1,5; 12, 18 등에 나타난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난다.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는 “모든 것을 돈으로 바꾸어”로 번역되기도 한다. 작은 아들은 모든 것을 모아서 먼 고장으로 떠난다.

“성경”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라는 표현이 비윤리적인 의미를 가지는 지는 사실 불확실하다. 우리 본문의 30절에서 큰 아들이 말한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에 비추어 비윤리적인 성적(性的) 방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작은 아들의 떠남은 공간적인 의미 뿐 아니라 심리적인 의미도 가진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뿐 아니라 큰 아들로부터 떠난다. 다시 말해 이들과의 공동체로부터 떠난 것이다.

14절은 독립 소유격인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으로 시작한다. 작은 아들이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데 그것의 원인은 심한 기근이다. 그래서 그는 15절에서 그 고장 주민에게 간청하여 돼지를 치게 되었다. 이것은 작은 아들이 유다인으로서의 정결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에게 돼지는 부정(不淨)한 짐승이었기 때문이다(레위 11,7; 신명 14,8).

1마카 1,47; 2마카 6,18; 7,1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율법에 충실한 것으로 표현된다. 더욱이 작은 아들은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원했다. 이와 같이 작은 아들은 정결을 포기한 부정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요구한 행동과 더불어 계속해서 부정적인(negative) 등장인물로 서술된다.

17절의 “제 정신이 들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표현의 의미는 “제 자신에게로 갔다”이다. 이 표현을 작은 아들의 회개로 해석하기도 한다. 18-19절에는 작은 아들이 준비하는 말이 소개된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음 세 가지를 말하려 한다.

첫째,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하느님 대신에 사용되는 완곡한 표현인데 루카 6,23; 12,33에서도 발견된다. 둘째,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여기서 작은 아들은 아들로서의 위치를 포기한다. 그와 아버지의 올바른 관계가 단절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들이 아닌 종이 되고자 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교와 공동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20절에서 작은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간다. 그는 고향이나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아버지에게로” 갔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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