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의 집 공간을 얻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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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의 집 공간을 얻기까지
  • 도로시 데이
  • 승인 2016.08.16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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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환대의 집-2

최근에 우리는 (그때엔 약 6명이었다.) 첫 번째 여자손님들을 위한 집으로 길 아래쪽에 있는 아파트에 세를 얻었으며, 7번가의 오래된 성 브리지드 교회 뒤에 있는 또 다른 장소를 남자들의 숙소로 쓰기 위하여 구입하였다.

인생은 아무리해도 전혀 평화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중의 몇몇 사람들은 술을 마셨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진짜 문제는 공간이었다. 그리니치 마을 변두리의 서부지역에 살고 있는 한 사제가 본당 구역내에 있는 한 낡은 집을 빌리라고 우리에게 제안했을 때 우리는 그곳으로 이사하였다.

챨스가에 있는 그 새로운 거주지는 좀 더 컸다. 적어도 우리는 한 장소에서 모두가 함께 있을 수 있고 그렇게 하여 서로서로 의지가 될 수 있었다. 그 해 내내 우리는 그곳에 있을 수 있었고 임산부조합과 일꾼학교를 시작하였다. 물론 그때까지 우리는 이미 옷들을 수집하고 나눠주는 일에 꽤 경험을 쌓았으나, 반면에 부엌의 세세한 일들은 계속 시간을 넘기며 처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더 방이 필요하였다. 모트가의 몇 채의 집을 상속받은 우리 독자중 한사람인 게르트루트 부르케는 만일 우리가 전면에 있는 건물들의 집세를 모을 수 있다면 뒤에 있는 방치된 건물을 사용해도 된다는 제안을 하였다. 나는 그 건물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내려갔다. 나의 첫 반응은 그러한 곳을 세놓으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의분같은 것으로 표현되었다.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왔고 더 비좁아졌기 때문에 나는 부르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였으며 나의 경솔함을 후회하였다. 그녀는 퇴직한 전산기사인 메리레인이란 친구와 함께 우리를 자주 방문하였다. 우리의 성실함에 대한 메리의 맹목적인 믿음은 게르트루트에게는 지속적인 확신을 주었는데 교구 출판사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이 일치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자주 불안해하였다. 나는 그 문제를 그녀와 다시 논의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집세를 내야하는 어떤 의무도 없이 뒷편의 건물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때쯤 나는 뉴욕의 트로이에 있는 착한 목자 수도회와 면담 약속을 하였다. 다른 유사한 수도회들과 마찬가지로 이 수도원은 법정에 의해 그들에게 맡겨진 온갖 기록의 젊은 여인들에게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었다. 수도원과 연결된 집은 막달레나의 집으로 죄를 짓고 참회하는 여자들로 구성된 집으로서 수도회 안의 또 다른 수도회였다. 그들은 엄격하게 은둔생활을 하고 있으며, 활동적이고 명예를 존중하는 수녀들은 그들을 정중히 대해주었으며 그들의 기도에 의지하고 있었다.

나는 막달레나의 집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도움이 필요한 우리의 여성들에 관하여 그들에게 말하면서 나는 우리를 위해 더욱 큰집이 생기게 특별히 기도해 달라고 그들에게 요청하였다.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듯이 기도하고 또한 모든 것이 네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일하라”는 훈계를 기억하면서 나는 버크양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의 응답이 한 주일 내에 왔다! 우리가 처음에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했다고 그녀는 썼다. 왜냐하면 그녀는 부롱스의 가난한 암 환자들을 위한 병원인 갈바리집을 운영하는 미망인들에게 두 집을 다 내놓길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우리가 비어있는 뒷편 건물을 사용할 수 있겠는지 그들에게 물어보았으며 그들이 동의했다고 말했다.

이 여성들의 관대함은 놀라운 것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우리가 스무개의 방이 있는 건물을 무엇에 사용하려고 하는지 알려고 기다렸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우리가 계속해서 벽을 바르고 칠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꽤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그후에 그들은 새로운 화재 비상구를 설치하고 “화재지연복도들”을 만들어 건물을 수리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마운 일은 늘어나는 우리의 가족들에 관해서 이웃으로부터 쏟아지는 수많은 불평들도 진득하게 참아주었다.

우리는 실제로 누가 수리비용을 지불했는지 확실히 알 길이 없었다. 아마도 게르트루트 부르케나 아니면 두 미망인들이 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부르케 양이 지불했다면, 미망인들은 우리보다 더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돈이 우리에게 쓰여진 것을 아쉽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에 대하여 기사를 썼던 드와이트 맥도날드가 말했듯이, 우리가 돌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것처럼 보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망인들의 기품있는 모습들을 보건대, 우리가 한 영혼을 구했다면 계속 이렇게 움직일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누가 말한 것처럼 한 영혼은 한 주교가 수행하는 직분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가톨릭 일꾼이 인정받는 자선활동 조직체라기 보다는 한 운동이므로 미망인들은 심지어 우리의 세금까지도 지불해 주었다. 정부나 혹은 조직에 의한 책임성보다는 개인의 책임성을 강조한 덕분에 우리는 내내 많은 내용을 감수해야 했지만 이런 경우에는 미망인들에도 부담을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그것은 그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

우리는 1936년부터 1950년까지 14년간 모트가에 살았다. 더 많은 방이 필요하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앞 건물의 아파트들을 빌렸고, 마침내 그 건물이 비게 되었을 때 38개의 방과 두 개의 상점이 있는 그곳을 차지하게 되었다.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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