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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평화-양심적 병역거부자, 그리고 가톨릭일꾼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10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한 신문

전쟁은 모든 환대의 집들에게 어려운 시기였으며, 뉴욕의 우리 환대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 시기를 모트가에서 견디어냈다. 그리고 우리의 평화주의적 입장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한번은 남자들에게 징병에 가입하지 말라는 주장을 <가톨릭일꾼> 신문에 기재하였는데, 나는 법정에 불려가서, “도로시, 당신은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나는 그말의 뜻을 확실히 몰랐지만 동의했다.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양심을 따라야 했으며, 후에 그 때문에 감옥까지 가게 되었다. 그런데 신문을 내는 우리의 일은 다른 이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것이지, 그들이 준비되지 않은 행동을 하라고 충고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양심을 일깨우는 “전쟁에 관한 우리의 노력”은 주로 상선의 선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육지에 도착한 많은 선원들은 친구를 가장한 도둑들을 만났으며 이 도둑들은 그들에게 독주를 먹이고 가진 모든 것들을, 심지어는 옷가지들도 빼앗았다. 선원들이 갱내수에서 배를 타는 댓가로 많은 보너스를 받는 사실이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야수들은 먹이를 기다리며 누워 있었다. 그저 즐기려고 하던 선원들은 뉴욕의 부두와 바우어리 주변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이런식으로 추락할 때 얼마나 빠르게 자신들의 존엄성을 잃어 버리게 되는지 그 사실에 나는 늘 슬픔을 거두지 못했다. 한 그룹의 구성원들로서, 파업중인 조합원들로서 그들은 가난과 궁핍을 견딜수 있었다. 그러나 빵 배급을 타기 위하여 줄을 서야하고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기 위하여 일을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이들을 완전히 비참한 낙오자로 느끼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으며, 이전에 도움을 주었던 구호기관에 대해서도 전혀 확인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직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들을 채우려고 노력했으며, 그들이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도록 또한 약간의 자기 존중감을 가지도록 도우려고 노력했다. 전쟁이 계속 되면서 우리는 어떤 친구들을 더 이상 못보게 되었다. 우리는 그중 어떤 사람이 어뢰 공격을 받았으며, 며칠 동안 허기와 갈증의 고통을 겪은 후 무방비 상태의 배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역기피자로 잡혀갔던 데이빗 메이슨

환대의 집에는 너무 아프거나 늙어서 징집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양심상의 병역거부자였지만 수용소에 갈수 없는 사람들밖에 남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에 피터 모린마저 병들어서 어린애처럼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련의 기간중에 크게 힘이 되어준 사람을 얻게 되었는데, 그는 필라델피아 한 신문사의 교정원이었던 덩치가 크고, 움직임이 느린 데이빗 메이슨이었다. 그 자신도 필라델피아에서 환대의 집을 운영하였는데, 전쟁으로 그곳이 문을 닫게 되자 우리에게 오게 되었다. 데이빗은 요리와 운영을 맡았는데, 활동적인 젊은이들이 점차로 줄어들게 되자 신문 내는 일도 담당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어떤 위기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수많은 위기들이 닥쳐오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연방수사국 요원 두 명이 와서 그를 찾았다. 하루종일 앉아 라디오에서 나오는 교향곡을 듣고 있었던 한 노인이 그들을 윗층 부엌에까지 친절하게 안내했다. 거기에서 그들은 커다란 여자용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과일을 졸이고 있었던 데이빗을 발견하였다. 나이가 이미 45세였지만 아직도 수개월이 남아 있는 징병 대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는 등록하지도 않았으며 양심적인 병역 거부자도 아니었던 것이다.

수사요원들은 그를 체포하고 웨스트 가에 있는 유치장으로 데려갔다. 그는 갇히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는데, 환대의 집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긴 소설을 몰두해서 쓸 수 있는 시간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유일한 불평은 젤리에 대한 것이었는데, 젤리가 고무공처럼 질기다는 것이었다.

그의 대한 재판이 열리자 판사는 그를 즉시 석방하였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자리를 비운후 우리의 큰 안도와 기쁨 속에 데이빗은 돌아왔으며, 다시 요리하고, 글을 쓰고, 편집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발명을 하는 일을 계속 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중국어 타자기를 조립하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그의 작업장이 세 사람의 거주공간을 차지한다고 주장하는 환대의 집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최근에 기록철에서 우연히 보게된 이 편지가 얘기하듯이 다른 환대의 집들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빌어먹을 전쟁 때문에 

나는 밀워키 환대의 집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내가 알기로 그 결정은 많은 기도와 정신적인 고뇌 후에 이루어졌다. 그곳에 살고 있었던 여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겪었다. (남자들은 징집되었거나 양심병역 거부자 수용소에 가버렸다)... 옳은 일을 하려 하는데 모든 것들이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고...

이 모든 말이 소름끼치게 들리고 나는 이런 소식을 무거운 마음으로 쓴다. 내가 가졌던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가졌던 것이 영원히 사라지고 있다. 빌어먹을 전쟁! 빌어먹을 평화주의와 그 지지자들! 나는 뮤니히 시절에 누렸던 평화보다 가톨릭 일꾼 안의 평화, 질서의 고요함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 평화는 어느 곳으론가 가버렸다. 지금은 그 자리를 대신 해서 불확실함과 혼란이 있을 뿐이다. 그 모든 일들 중에서 가장 슬픈 것들 중에 하나는 우리가 전에 함께 알았던 따뜻함과 이해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깊은 불일치의 벽이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고 그 벽은 매일매일 더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당신들이 이교도가 아니길 얼마나 원하고 있는가! 그리고 때때로 내가 이교도 였으면 하고 얼마나 원하는지! 그러나 당신들에게 동의하게 되면 나 자신을 당신들의 세계보다 훨씬 더 넓은 세계로부터 떼어놓는 것인데 그 고통을 당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것에 비하면 현재의 이 분리의 고통은 빈약한 것이다.

나는 참으로 여러분의 영적인 힘이 필요하다

제발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이런 말이 편지를 끝내기 위한 말이나 어떤 신심 깊은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참으로 여러분의 영적인 힘이 필요하다. 청년들은 하나씩 하나씩 살아 졌다. 처음엔 지미,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톰이. 이제 처음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나만이 남았다. 새로운 태도들, 새로운 관점들의 새로운 세계를 직면하게 될 것이다. 내가 가톨릭 일꾼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이 새로운 세계가 그다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을 터인데- 그러나 모두가 떠나간 환대의 집에서 나는 너무 괴롭다.

점점더 많은 환대의 집들이 문을 닫는다는 이와 같은 편지들이 우리의 마음에 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모두다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다양한 방문객들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들은 함께 있는 동안 온갖 이야기들로 웃음꽃을 피웠고 얼마나 집을 밝게 해주었던가! 나는 특히 러시아 친구들중 한 사람인 코이란스키 박사를 기억하는데, 그는 항상 병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델라웨어 협곡 아래쪽에 있는 살라마의 환대의 집에 친구인 이리나 드자르예브스키와 함께 갔었던 얘기를 즐겨했다. 3명의 러시아인 망명자들은 나무 꼭대기에 낡은 차를 올려놓고 자신들만을 위한 나무집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끝없이 대화하고 보드카를 마시면서 여자들로부터 도망칠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스스로 최저음 가수라고 하는 이리나와 테너인 살라마가 함께 노래 부르면서 보드카술병주위를 빙빙 도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배급제였긴 하지만 우리는 설탕을 넣은 커피와 고기가 있는 스튜를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대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용품들은 대부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우리는 겨우 유지해 갔으며, 여분의 돈이 없었다. 우리 기금이 바닥나는 것은 게리 샤우네시와 술통 사건과 같은 비극이 될 수 있었다.

마치 나뭇잎이 타는 냄새가 교외지역의 계절을 나타내듯이 매해 가을마다 포도냄새와 포도주가 발효되는 냄새가 이웃에 가득 풍겼다. 그 향기가 주는 유혹은 게리에게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이웃집의 포도주 저장실에 들어가서 이탈리아인 이웃들이 만들고 있던 커다란 포도주 통 하나를 두드렸다. 그는 잠에 떨어질 때까지 작은 술통 옆에 앉아서 계속해서 포도주를 마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천천히 새어 나와서 마루를 적셨다. 그래서 초라한 가난한 이들의 후원자인 우리들이 아무도 함께 거들지 않았고 게리만이 혼자 즐겼던 이 술에 대해 변상을 해야 했다.

전쟁 때문에 환대의 집은 문을 닫고...양심적 병역거부자 수용소는 늘고

1930년대말과 전쟁의 시작으로 환대의 집의 번성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된 한가지 이유는 징병과 양심병역거부자 수용소에 우리의 인력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시민의 공적 복무 수용소로 칭해진 이 수용소들은 실상 전통적으로 평화주의 교회로 알려진 퀘이커교도들, 메노파교도들, 그리고 형제회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칭했듯이 정부와 함께 “두 번째 마일을 가는 것”으로 시위를 하기를 원했으며 전쟁에 복무하는 대신 시민복무를 제안했다.

구 시민 보호 집단 수용소들은 경제공황 때에 일할 수 없었던 젊은이들과 십대들을 위해서 이용되었었다. 그들은 농사와 삼림 가꾸기 그리고 화재진압과 같은 고상한 일을 하였다. 이러한 수용소 건물들은 여전히 남아있었으며, 평화주의 교회들은 정부로부터 그것들을 인수하였다. 이 수용소들은 기숙비로 한 달에 35달러를 내야 했으며, 수용소입소 조건들을 받아들였고 평화시의 일들을 정부를 위해서 하였다.

가톨릭수용소

드와이트 라로우와 조우 자렐라 그리고 몇몇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가톨릭 수용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우리는 뉴햄프셔주의 스타다드에 있는 한 수용소를 인수하였다. 처음엔 소년들이 요리를 담당하였다. 그 후 서부 해안지역에서 서점을 운영할 때 내가 만났던 진짜 뉴잉글랜드의 주부인 에드나 화우어가 일년간 요리를 자원하였다. 그러자 사과파이 등 사과요리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수용소는 사과과수원 중간에 있었으며 아무것도 낭비되지 않았다. 심지어 수용소에 묵고있던 친구들은 밤에 삥 둘러앉아서 사과를 말리기 위해서 얇게 썰기도 했는데, 이렇게 해서 수용소에 체류하는 동안 사과파이의 식단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드나는 한 이웃 농부가 준 작은 돼지 한 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돼지는 부엌주위를 뛰어 다니고 모든 사람들의 뒷굼치에서 킁킁 거렸다. 몇 개월이 지나자 그 돼지는 잡아먹어도 좋을 만큼 커져 버렸다. 물론 그들은 고기를 때로 먹을 수 있었으나 결코 하루에 두세 번 먹지는 못했다.

뉴햄프셔에는 두 개의 수용소가 있었으며 피터슨 주교는 매우 친절하였고, 때때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군대는 수용소를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식량이었으며,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었다. 수용소들은 문을 닫았으며 소년들은 다른 수용소들로 갔다. 그들 중 몇 명은 병원노무원, 남자간호사, 그리고 마취사로 일하기 위해 병원에 취직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정신병원과 심약한 이들을 위한 집에서 일하였다. 그들은 모두가 보수 없이 일을 하였는데, 사실상 그들은 생계를 위해서 보수를 기대하였다.

그들은 때때로 하루에 열두시간씩 일하면서 길고도 힘든 4년을 지냈는데, 매달 말에 도시 근처에서 나흘을 지내기 위하여 휴일들을 모으기도 하였다. 첫 해에는 보수도, 자리도, 충분한 음식도 없었다.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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