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평화주의를 선포한 토머스 머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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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평화주의를 선포한 토머스 머튼
  • 한상봉
  • 승인 2016.08.0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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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피스트회 수도승, 영성작가,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타고난 관상가요 예언자였다. 특별히 그의 시대가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등 참혹한 눈물의 골짜기를 건너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관상생활은 가톨릭교회가 평화에 대해 깊이 숙고하도록 이끌었다. 그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곧 ‘하느님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 사랑은 때로 ‘정치적 사랑’으로 발전하였다.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시절, 친구였던 로버트 랙스가 뉴욕6번가를 산책하다가 느닷없이 “자넨 대체 뭐가 되고 싶은가”하고 머튼에게 물었다. 머튼이 “그저 좋은 가톨릭신자가 되고 싶다”고 답하자, 랙스는 “그럼 성인이 되고 싶다는 거지?”라고 되물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지옥불을 면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성인됨’에 있다는 이 유명한 명제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머튼이 물었다. “내가 어떻게 성인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때 랙스가 멋진 대답을 날렸다. “성인이 되기를 바람으로써.” 마침내 머튼은 켄터키 주의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함으로써 영적 여정을 시작했다.

‘오직 하느님께만’

그러나 머튼이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39년, 머튼은 스스로 ‘나는 어떻게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전쟁이 빚어내는 강렬한 파괴의 힘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지 ‘자기를 벗어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발적 가난을 사는 길만이 전쟁을 막고 평화로 가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에 수도원에 들어갔다.

머튼은 세상을 떠나 ‘오직 하느님께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은둔과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내 마음 속에 도사린 폭력과 베트남 전쟁에서 발생하는 폭력이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동안 수도자들은 ‘세상에 대한 경멸’이라는 외투 뒤에 숨어 고통 받는 이들을 돌보라는 복음적 명령을 거절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1961년부터 도로시 데이가 발행하는 <가톨릭일꾼> 신문에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글은 1962년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라는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었으나, 군비경쟁을 반대하는 이런 글은 수도자가 쓰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돔 가브리엘 총아빠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교회 장상들은 교회가 사회문제에 관여하는 걸 꺼리는 분위기였다. 권위주의에 빠진 교회는 수도자들을 세상 한가운데서 복음을 선포하는 ‘전위부대’가 아니라, 장교(장상)가 시키는 것만 따라하는 ‘후방의 화물운송부대’에 속해 있는 것처럼 부린다고 머튼은 비판했다.

머튼은 “현대세계에서 그리스도교의 이상과 복음적 태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면서, 오늘날 교회는 겉모습은 그리스도교이지만 “속빈 강정”과 같다고 말했다. 이른바 “무늬만 그리스도교일뿐 사실은 완전히 유물론적인 이교도의 영향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전쟁의 동기는 명분과 다르게 ‘더 많은 석유’, ‘더 많은 식민지’를 바라는 탐욕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전쟁은 범죄”이다.

머튼의 동반자였던 도로시 데이는 “하느님의 자비는 굶주린 사람을 먹이지만, 전쟁은 한꺼번에 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무기증강이나 전쟁을 반대하는 태도는 평화를 바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실천이다.

평화란 전쟁의 부재만 아닌 정의의 실현

다행히 머튼의 원고는 한정본으로 등사해서 은밀히 배포되었는데, 훗날 바오로 6세 교종이 된 밀라노의 몬티니 추기경도 받아볼 수 있었다. 또한 1962년 12월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토의자료로 교황청에 사본이 들어갔으며, 1965년에 발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인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에 중요한 내용들이 반영되었다.

이를 테면 “도시 전체나 광범한 지역과 그 주민들에게 무차별 파괴를 자행하는 모든 전쟁 행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범죄이다. 이는 확고히 또 단호히 단죄 받아야 한다”(80항)고 하였으며, 또한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79항)는 ‘대체복무제’ 지지 내용도 포함되었다.

사목헌장의 이러한 내용은 이미 1963년에 요한 23세 교종이 발표한 <지상의 평화>를 통해 확인된 것이었으며, “평화란 전쟁의 부재만이 아니라 정의의 실현”이라는 ‘그리스도교 평화주의’가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첫 사례다.

정당한 전쟁론 유감

머튼은 자신의 평화론에서 ‘정당한 전쟁론’을 비판했다. 히포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들의 침략을 보면서 불가피한 전쟁을 논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늘나라에서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루카 20,35)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재산도 소유하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 기르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성직자나 수도자로서 완전히 영적 삶에 자신을 바치지 않는 이상, 자기가 사는 지상도시에서 벌어지는 전쟁에도 참여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다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전쟁의 동기가 중요했다. “선익을 위해 행하는 자비의 전쟁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선익’에 대한 판단이다. ‘정당한 전쟁과 폭력 허용’은 십자군 전쟁과 이단 심문의 빌미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16세기에 라틴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정복자들은 우상숭배를 행하는 문명을 없애야 한다는 신성한 사명을 띠고 ‘미개한’ 원주민들을 학살했다. 이 연장선에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은 “공산주의자라면 양심에 거리낌 없이 쓸어버릴 수 있다”는 그릇된 신념을 심어 주었다.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그 결과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왕과 군주와 주교와 사제와 재상들이 백성들에게 사랑에서 우러나온 마음으로, 내적 좋은 의도를 잊지 말고, 무기를 들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적들을 죽이라고 얼마나 촉구했던가를 잘 알고 있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 얼마나 많은 묵주와 성물이 사용되었는지는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머튼에게 ‘성인’이란 하느님의 자비 안에 머물며,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는 자본과 국가의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며,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데 사심 없이 투신하는 사람이다. 나 없이 하느님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다. 스스로 무장해제를 감행하는 두려움 없는 사랑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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