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 90%를 위한, 샤를 드 푸코
상태바
하위 90%를 위한, 샤를 드 푸코
  • 한상봉
  • 승인 2016.08.29 15: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집에 에어컨도 없지만, 에어컨이 있어도 전기료 폭탄이 무서워 틀지 못하는 서민들에게는 ‘분통 터지는’ 8월이었다. 대통령은 여당 전당대회가 끝나자 그 지도부를 청와대에 초청해 송로버섯, 바닷가재 등 최고의 메뉴로 오찬을 즐겼다 한다. 특히 송로버섯이 구설수에 올랐다. 이 버섯은 유럽에서 캐비아, 푸아그라와 더불어 세계 3대 진미로 꼽히는 값비싼 음식이라는데, 전량 수입하는 이 버섯은 이탈리아에서는 900g에 1억6천만원, 프랑스산 냉동버섯도 500g에 158만원이라니 가난한 이의 마음은 참담하다.

역사학자 전우용 씨는 트위터에서 “조선시대 임금도 가뭄, 혹서 등으로 백성이 고생할 땐 임금 밥상에 올리는 반찬 가짓수를 줄이라는 ‘감선령’을 내렸다”며 고통분담 시늉도 안 하는 정부와 대통령을 꼬집었다. 한시적 누진세 인하 언급에 “초호화 메뉴를 먹으면서 서민 가정 전기료 6천 원 깎아 주는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했다는 거군요. 고작 몇 천 원 가지고 징징대는 서민들이 얼마나 찌질하게 보였을까?”라고 비판했다. 국민들이 뽑아주었으니 국민을 섬겨야 할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섬기겠다고 맹세하며 자축하는 자리에서 ‘저들만의 잔치’를 연 셈이다. 상위 10%를 위한 공화국에서 하위 90%의 호소는 안중에 없다. 90%에게는 “조용히 있으라”는 말만 들릴 뿐이다. 누구 말대로 “한심한 정부”다.

사진=한상봉

우레탄 지붕 밑에 사는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지난 봄에 부산 산동네에 있는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낡은 지붕을 우레탄으로 덮은 그 집은 얼마나 더울까, 생각한다. 매춘여성들과 이웃으로 지내며 일터로 나가는 자매들은 ‘가난’을 훈장처럼 달고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더위가 그들을 피해가지는 않을 텐데, 걱정이다. “가장 낮은 자리로만 찾아가는 기쁨을 알아챈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스승인 샤를 드 푸코(1858-1916)를 기억한다.

푸코는 여섯 살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었으니, 박근혜 대통령의 처지는 오히려 나은 편이라 말해야 할까. 물론 푸코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기숙사에서 학생으로, 프랑스 군대에서 군인으로 별로 모범적이지는 않았다. 나중에 막대한 유산을 받게 되면서는 방탕한 생활이 이어졌다. 이런 샤를 드 푸코를 구원한 것은 놀랍게도 아프리카에서 만난 무슬림이었다. 푸코는 “신앙이란 부녀자들에게나 어울릴 것”이라며 경멸해왔지만, 무슬림들의 강직한 신앙을 보고 가톨릭교회로 회심하였다.

오만한 자는 바닥으로!

샤를 드 푸코

파리에서 만난 위블랭 신부는 종교적 토론을 청하는 푸코에게 “먼저 무릎을 꿇고 고백성사를 보라”고 했다. 푸코가 울며 죄를 고백하고 일어섰을 때, 위블랭 신부는 “아직 아침밥을 못 먹었죠?”하며, 즉시 성체를 입에 넣어주었다. 종교에 관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오만한 자는 바닥으로!”라는 파스칼의 말처럼 겸손해지는 것이었다. 그 후 푸코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마당을 쓸고 종지기 노릇을 하였다. 나자렛의 글라라수녀원에서는 올리브산과 베타니아가 보이는 그곳에서 정원을 가꾸고 나무의자에서 몸을 꼬부리고 잠을 청했다.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냐고 물으면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 위에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함을 겪으셨다지요” 하고 말했다. 푸코는 수도원에서 신데렐라처럼 살고 있는 수녀들을 위해 비천한 자리에서 머슴처럼 살았다. 30년 동안 부모에게 순종하고, 가난한 이들 틈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숨어계신 하느님’ 예수를 본받고 싶어 했다.

 “성 요셉은 신학을 알고서 못질을 했을까?”

푸코는 명예와 과시욕에 사로잡혀 고요히 머물지 못하는 이들 앞에서, 오직 숨은 데서 보시는 하느님께만 인정받기를 갈망했다. 그가 보통 머슴이 아님을 눈치 챈 수녀원장은 푸코가 사제가 되도록 도왔는데, 프랑스에서 신학공부를 하면서도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성 요셉은 신학을 알고서 못질을 했을까?” 스스로 반문했다.

푸코는 복음적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는 추상적인 신학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1901년 사제서품을 받고나서 사하라 사막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흰색 베두인 옷을 입고, 가슴에 ‘붉은 심장 위에 놓인 십자가’ 표지를 달아 붙였다. 푸코가 빵과 물만 먹으며 한 달에 7프랑의 식비만 지출하며 살아가는 동안 오래 전에 교회가 잃어버렸던 사막의 영성이 되살아났다.

푸코는 호가르 계곡의 은둔처에서 봉쇄된 수도자처럼 살았다. 가끔 지나가는 프랑스 군대와 미사를 봉헌했고, 주로 오아시스에서 오는 원주민들과 사귀었다. 그를 찾아오는 이들이 친구이든 원수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무슬림이든 환대하였고, 이들 역시 자신을 ‘형제’로 알아주길 기대했다. 푸코는 손노동으로 자신의 빵을 먹으며, 제복도 봉쇄도 형식도 없이 나자렛 시절의 예수처럼 자유롭고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이상을 품었다. 그리고 흔히 수도원에 있기 마련인 아빠스 등 ‘존경하올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불리는 교계제도가 만들어낸 어떤 권위주의적 요소도 없애고 싶어했다.

불의를 보고도 ‘짖지 못하는 개’

그는 프랑스의 아프리카 정복을 직접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에 맞서서 프랑스 관리국과 종종 분쟁에 휘말리곤 했다. 그는 자신이 사막의 은수자라고 해서, 불의를 보고도 ‘짖지 못하는 개’나 ‘졸고 있는 파수꾼’이 되는 걸 거부하였다. 

그는 철저한 가난을 실천했는데, 수도생활조차 “선물과 애긍 희사와 연금으로 숨어 사는 가난이 아니라, 소박하고 비천한 노동으로 가난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유함 안에 도사린 위험을 알아챘다. “우리는 부유한 사람들도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사랑하지만, 그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련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유산으로 주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자!”고 말했다.

영적 스승이었던 위블랭 신부는 푸코에게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하도록 그대는 가장 끝자리를 차지하라”고 말했고, 푸코는 그대로 살다가 1919년 사막에서 죽임을 당했다.

대통령 오찬에 참석한 이들은 이런 푸코의 삶을 “어리석다” 할 것이다. 상위 10%의 마인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제 나라 국민이 진도 앞바다에서 아무리 억울하게 수장되어도 이미 슬퍼할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권력이 측은지심을 삼켜버린 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 때문에 분통이 터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슬픈 팔월이다.


한상봉(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