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산주의란 단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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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란 단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 도로시 데이
  • 승인 2016.07.27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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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2: 모든 이의 신문-2

얼마후 우리 아파트 바로 아래층 이발소가 비게 되었다. 나는 그 곳이 사무실로 적격임을 알았다. 이발소 자리는 옆으로 길고 또 좁은 공간이었다. 방 뒤쪽엔 침실이 있었고, 또 침실 뒤에는 부엌이 있었다. 또한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으며, 마당에는 정원과 또 일부 포장된 공터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 곳을 손님도 맞고, 차도 함께 마실 수 있는 야외 거실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몇 가지 중고가구, 예를 들면 책상, 탁자, 화분 그리고 한 쌍의 의자를 배치하며 또 다른 시작을 하였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오기 시작하였다. <가톨릭일꾼> 사무실에 오는 두 명의 정기적인 방문객들은 여위고 남루했는데, 피터가 나가기 전 이른 봄 유니온 광장에서 데려 왔을 때엔 꽤 수상쩍어 보였던 한 쌍들이었다. 피터에게 그들은 ‘노동자들’을 대표했다. 그들은 피터의 말을 지치지 않고 중단 없이 듣곤 하였다. 그들은 꼭 약속한 것은 아니나 무엇인가에 기대를 걸고 있는 청중의 시작이었다.

그 광장에서 피터의 토론을 들은 후, 그들은 항상 나의 집까지 피터를 따라왔는데, 내 집엔 별로 나아지는 것은 없어도 빵과 달콤한 차는 있었다. “그들은 잘 곳이 없어요”라고 피터는 매번 말했었다. 그는 내가 바우어리에서 침대 두 개를 사는데 필요한 달러를 마련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종종 달러가 없어서 그들은 점심식사 때에만 머물렀다.

피터가 시골에 있는 동안에 그들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나를 방문했다. 그들은 항상 내가 문을 열기 전에 “돌란과 이간이 다시 왔소”라고 큰소리로 말하였다. 그래서 내 시간을 뺏는 것에 내가 얼마나 분노하는지를 알고 있는 다른 친구들은 “돌란과 이간이 다시 왔어요”라고 외치면서 집으로 들어오곤 하였다.

“남자는 제안하고 여자는 거절한다”라고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이발소 위층에 있는 나의 아파트 문을 누가 두드릴 때, 나는 성급함을 억제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방문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하며 긴장하여 서 있었다. 언제 그런 방문이 오지 않을까 하면서도 어쨌든 나는 문을 열었다. 그런데 피터 모린이 서 있었다.

“피터! 어디에 계셨었어요?” 안도감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나의 환영은 열렬했다. “노동절에 당신은 어디에 계셨어요? 유니온 광장에 수천 명이 있었지만 피터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어요!”

“모든 이의 신문은 누구의 신문도 아니오”라며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그 전의 이 말을 반복했다. 피터는 휴식을 취한 것 같았고, 그 전처럼 뿌옇게 먼지를 쓴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회색눈은 다시 돌아온 것이 기쁘다고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커피와 수프를 준비하고 빵을 꺼내는 동안, 그는 쉬지 않고 말했고, 나는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을 말하는 것을 그가 수프를 먹을 때까지 기꺼이 기다렸다. 그의 입이 음식으로 가득 찼을 때 그는 내 말을 들을 것이었다.

나는 그가 왜 가버렸는지에 대하여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다. 그저 “남자는 제안하고 여자는 거절한다”라고, 비꼬듯이 할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이유에 가장 가까운 설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으며, 그의 눈은 따뜻했다. 나는 그가 다시 돌아온 것에 행복해 했고, 자신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참을성이 많았으며, 이제 나를 이미 성령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은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로서가 아니라 전(前)사회주의자와 전 공산주의자로서 볼 준비가 되었는데, 그러한 내 모습 속에서 그는 몇 가지 일치점과 토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즉각적인 관심은 더 나은 임금과 적절한 노동시간을 얻기 위한 파업과 투쟁에 있었다. 성 아우구스티스가 말했던 것처럼, “병은 여전히 전에 담아 놓았던 술의 냄새를 풍길 것이다.” 나는 바오로 사도가 항상 말했던 것처럼 그가 내 정신을 그리스도의 자유와 일치하도록 일깨워주고 내 마음을 더 멀리 볼 수 있도록 넓혀줄 때까지 계속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격주의자는 이웃에게 선을 행함으로써 선하게 되려고 한다

피터는 나를 교육시키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책을 꺼내면서 그가 떠났을 때까지 행사했던 권리를 다시 붙잡았다. 아마도 그 책들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전기나 그 당시 영국의 공동체에서 살고 있었던 작가이자 저술가이며 예술가이고 장인이었던 에릭 길의 저서들, 혹은 그 공동체를 격려했던 빈센트 맥나브 신부의 짧은 책 <나자렛> 혹은 <사회적 무질서>였을 것이다. 피터가 왜 <가톨릭일꾼> 창간호에 실린 이야기들이 적당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그의 사상을 이해하게 된 것은 점차적인 많은 대화를 통해서였다.

그는 ‘노동의 철학’이라는 것에 대해 종종 말했다. ‘노동은 임금으로 대체될 수 없으며, 노동자는 사고 팔 수 있는 소모품이 아니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들 중 하나였다. ‘인격적인 책임이 국가의 책임보다 중요하다’란 것이 또 다른 그의 주장이었다. 피터가 그의 주장의 원천으로 좋아하는 자료는 임마누엘 무니에의 ‘인격주의자의 헌장’이었는데, 그는 듣기를 원하는 사람 누구나를 위하여 이것을 즉시 불어에서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결국 미네소타 주에 있는 성 요한 수도원의 분도회 사제인 버질 마이클 신부를 설득하여 번역하도록 하였다. 피터는 그것을 출간하였다. “인격주의자는 주는 자이지 얻는 자가 아니다”라고 그는 말하곤 했다. “인격주의자는 이웃이 가지고 있는 것을 얻으려하지 않고,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한다. 그는 이웃에게 선을 행함으로써 선하게 되려고 한다. 그는 공동선에 대한 사회적 가르침을 지니고 있다. 그는 타인 중심이며 자기중심이 아니다.”

가톨릭 급진주의자
“파업은 나를 파업하게 하지 않는다!”

훨씬 지난 후에야, 나는 창간호를 다시 보면서 피터를 괴롭힌 것이 무엇인지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피터가 노동의 철학에 대하여 대화하려고 시도하고 있을 때 임금과 노동시간을 강조하였다. 나는 산업사회 안에서의 여성들과 아이들 그리고 착취공장과 파업에 대하여 썼다.

“파업은 나를 파업하게 하지 않는다!”라고 피터는 완강하게 계속 말해왔다. 피터는 우리가 너무나 오래되어 이제는 새 것으로 보이는 철학으로 사회 자체를 재건설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산업사회의 체제를 일시적으로 수정하자고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심지어 신문의 이름조차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었다. 그는 ‘가톨릭 급진주의자’를 신문 제목으로 더 선호했는데, 급진주의자들은 그 이름이 나타내듯이 사물의 뿌리에 닿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원탁토론, 환대의 집, 농장과 농업대학

6~7월의 두 번째 호는 우리가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실었다. 신문사설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피터 모린은 (지난 호에 우리가 이름철자를 잘못 기재했던) 이번 달 기고문 속에서 그의 프로그램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그의 프로그램이 특별하고 확고했기 때문에 사설란보다는 기고자로서 신문과 연관 맺는 것이 더 좋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피터의 사설이 뒤따랐다:

“편집자로서 내가 <가톨릭일꾼> 신문에 제안된 어떤 개혁을 지지하거나 옹호한다고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나의 일을 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내가 서 있는 입장을 이해시키고 싶다.

나의 프로그램은 세 가지를 표명한다: 하나는 원탁토론인데, 나는 6월 마지막 일요일에 맨하탄 연회장에서 첫 번째 원탁토론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150명을 수용하는 홀(강당)을 10달러에 8시간동안 빌릴 수 있다. 나는 3달러를 이미 지불했다. 지금은 더 이상 내게 돈이 없지만 나머지는 모금할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이 모임에 참여하길 바란다. 나는 공산주의자들, 급진주의자들, 사제들과 평신자들 모두를 환영한다. 나는 모든 이가 자신들의 관점을 일보 진전시키길 원한다. 나는 사고의 명료화를 원한다.

프로그램의 다음 단계는 환대의 집이다. 중세기엔 나그네들에게 환대의 집이나 호스피스(여행자 숙소)를 제공하는 것이 주교의 의무 중 하나였다. 이런 집들은 반(半)집처럼 특별히 지금 필요하며, 또 나의 프로그램에 꼭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6개월 동안 무료로 집을 빌려주길 희망하고 있다. 사제가 그 집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게 될 것이고, 원탁토론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그 환대의 집에서 함께 협력하며 일할 사람들이 뽑히게 될 것이며 점차적으로 공동농장과 농업대학에도 일꾼들이 보내질 것이다. 공동농장과 농업대학은 내 프로그램의 3번째 단계이다. 사람들은 땅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기계가 노동을 대체시켰다. 도시들은 만원이다. 땅이 그들을 돌보게 될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란 단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의 전체 계획은 유토피아적, 그리스도교적 공산주의이다. 나는 공산주의란 단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프로그램이 모든 이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려고 선택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책임감 있는 사유재산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유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위탁된 것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목표들에 관한 이러한 간결한 목록은 주요 사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기호엔 너무도 유토피아적으로 여겨졌다. 나는 환대의 집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여성들이 제외됐고, 사제 밑에서 살아가는 남성들의 집단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 질색했다.

피터의 사설에 덧붙여서 쉬운 글들 몇 가지가 있었다. 그 중 하나에서 그는 환대의 집과 공동 농장의 설립을 제안하면서 은유시인의 분위기를 갖고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학문적으로 되지 않도록 우리의 정신을 훈련시키기 위해
원탁 토론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훈련 안 된 정신이 천박해지지 않도록
원탁토론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혹은
반드시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학자들로부터 배우기 위하여
원탁토론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일이 현재 있는 상태로부터 되어야 할 상태로 가기 위하여
어떤 방법이 가능한지 배우기 위해서
원탁토론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부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하여
환대의 집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주교들이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사람들이 주교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환대의 집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가톨릭 기관들이 사회정의를 실천할 수 있기 위하여
환대의 집들을 필요로 한다.

실업자들은 무료 셋집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농업 대학에서 무료 셋집을 가질 수 있다.

실업자들은 무료 연료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그것을 농업대학에서 얻을 수 있다.

실업자들은 무료 음식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농업대학에서 그것을 기를 수 있다.

실업자들은 기술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
농업대학에서 그들은 그것을 습득할 수 있다.

(계속)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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