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앞에서 돈을 업신여기는 교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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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에서 돈을 업신여기는 교회를 꿈꾼다
  • 최태선
  • 승인 2021.06.2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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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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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가페서점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그렇게 드나들던 어느 날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이 제게 혹시 목사님이 아니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을 했더니 신부님들처럼 책값을 할인해주는 카드를 발급해 주셨습니다. 그 이후 만나면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분이 제게 목사님 안녕하시냐는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그곳에 계셨던 수녀님이 말을 거셨습니다. 그리고 책을 하나 소개해 주셨습니다.

수녀님이 권해 주신 책

오래 전 일이라 책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빨간 표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수녀님의 권유에 따라 그 책을 샀습니다. 읽어보니 한 장로교 교수 부부가 가톨릭이 이단임을 입증하기 위해 자세히 조사를 하다가 오히려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가톨릭대학에서 그것을 가르치는 교수가 된 이야기가 담긴 책이었습니다. 제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돌았습니다. 사실 저도 오래 전부터 가톨릭이 이단이라는 주장을 들어왔고, 특히 가톨릭 신부였다 개신교 신자가 된 분들의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입니다.

책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았지만 틀린 점이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개신교 교리에 정통한 친구 목사님에게 보내 살펴봐 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책을 건넨 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어떤 점이 틀렸는지를 발견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틀린 점이 없어서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관점에 따라 입장이 바뀔 뿐입니다. 사실 그런 경험은 이미 많이 해보았습니다. 스님들이 성서를 읽으면 모순을 발견합니다. 그분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성서는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서를 읽으면서 하느님의 마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성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성서가 진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더욱 더 믿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지금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개신교 신자라면 가톨릭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걸 잘 알 것입니다. 오늘날 개신교 교회들은 개교회주의(이기적 교회)와 돈에 함몰되어 교회의 본질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교회들을 교회가 아니라 ‘맘몬의 신전’이라 부르고 그런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좀비’라고 부릅니다. 그런 개신교 신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아수라장이 된 개신교 교회지만 개신교 교회는 언제든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새로운 교회가 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개신교가 존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 자유 속에서 새로운 교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저만의 새로운 시도가 아니라 벌써 오래 전에 여러 나라의 개신교 안에 이미 시도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신교 목사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흐름에 동참하는 ‘남은 자’로서 개신교나 가톨릭의 구분 없이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교회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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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의 역사

제가 가장 믿기 어려운 구약의 본문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백성들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만일 야훼가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르멜산에서의 이야기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었지만 열왕기는 두 나라의 이야기를 교차해 가며 기록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를 이스라엘의 역사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서에는 말없는 성서 기자의 입장이나 하느님의 입장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역사와 관계가 없는 것은 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습니다.(예. 창세기 17장과 18장 사이의 시간 차) 그러므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는 모두 성서가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로 인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 기사의 내용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양다리를 걸치고 엘리야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스라엘이라면 ‘야훼 하느님’이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르멜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엘리야는 대승을 거두었고 예언대로 안 내리던 비까지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오히려 도망을 가야했습니다.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으면 야훼께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까지 하였을까요. 야훼의 예언자가 자기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가르멜산 정상의 당당했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엘리야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야훼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 맞추지도 않았던 칠천 명을 남겨 두리라.”

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서로 자신들의 역사가 하느님 나라의 역사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십니다. 그들이 진정한 당신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역사가 남은 자들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이제 아실 것입니다. 가톨릭은 가톨릭의 입장에서, 개신교는 개신교 입장에서 그리스도교 역사를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남은 자들(예수의 제자들)의 역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신교 목사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가톨릭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결론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가톨릭을 이단이라 하고 가톨릭은 개신교가 교회가 아니라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도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교 역사가 그리스도인의 것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역사이고 이스라엘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그것은 남은 자들의 역사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남은 자들을 남기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도 않은 칠천 명을 남기십니다. 여기서 칠천 명이란 어느 정도 많은 사람일까요. 적어도 이스라엘은 수백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칠천 명이란 극소수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수백만 이스라엘 가운데 겨우 칠천 명만이 참 이스라엘입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맘몬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맞추지도 않았던 칠천 명을 남겨 두리라.”

주님은 오늘날의 교회들을 보고서도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돈을 업신여기는 교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남은 자들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하느님 나라의 남은 자들은 하느님을 섬기고 재물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저를 인도하시는 주님에게 제가 명확하게 배운 것은 ‘가난’과 ‘비능력’(non puissance)입니다. (가난에 대해서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권력과 가까이 있었습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님은 전능(tout puissant)하셨습니다. 하지만 능력을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사탄이 기적을 행해 보라고 했지만 하지 않았고, 도망갈 수 있었지만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피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자끄 엘륄이 말하고 제가 따르는 ‘비능력’입니다.

이 둘 모두는 돈과 관련됩니다. 돈은 부와 능력의 대명사입니다. 돈은 분명히 부와 능력을 통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활발하게 활동하고 일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하는 일은 결코 하느님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초점은 돈을 업신여기고 무력화 하는 일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으면 돈을 업신여기거나 무력화하는 일을 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돈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똬리를 틀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이스라엘의 산당이 다시 새 이스라엘에도 등장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산당을 없애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새 이스라엘 역시 맘몬을 제거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대표자들이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의 핵심인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망각했던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산상수훈이라는 예수 복음의 알짬과 하느님 나라를 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돈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돈을 미워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재물과 하느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오늘까지 달려왔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면, 돈을 미워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게 지금까지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며 제 마음에 새겨주신 하느님 나라의 디엔에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보다 명확히 사랑할 수 있는 길은 돈을 업신여기는(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는 너무도 많고 다양한 신학과 교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업신여기는 일에는 그렇게 많은 신학과 교리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돈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교회의 모습은 성서에 기록된 유무상통하던 초기교회와 흡사할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볼 것입니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다시 희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기쁘고 행복한 일은 그곳에서 가톨릭은 물론 정교회와 개신교 신자들과 ‘신자들의 교회’(Believer’s Church)들과 같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사람들이 모두 다시 하나가 될 것입니다. 돈을 업신여기는 새로운 교회에서 개신교 목사인 저와 가톨릭 신자인 여러분이 자매와 형제로 만나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8호, 2021년 여름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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