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힘이 없으면 본회퍼가 히틀러가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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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힘이 없으면 본회퍼가 히틀러가 될 수도
  • 최태선
  • 승인 2021.06.2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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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얼마 전 나는 한 가톨릭 매체로부터 개신교 목사로서 바라보는 가톨릭에 대해 글을 하나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일단 수락은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한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수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오갔다. 하지만 어느 것도 적절하다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마지막 시간에 쫓겨 글을 써서 보내긴 했지만 찝찝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개신교 목사로서 가톨릭을 바라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사실 무의미한 일이다. 개신교 목사로서 가톨릭을 바라본다는 것은 사실 모르는 것에 대한 생각을 묻는 것과 같다. 개신교 목사로서 가톨릭에 관한 글을 쓰려면 최소한 한동안 가톨릭 신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평신도가 아니라 수사나 사제가 되어보아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바라보는 가톨릭은 결과적으로 피상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피상적인 내용으로 무언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피상적이라는 말이 대단히 중요하다. 피상적이란 겉만을 안다는 의미이다. 겉만을 보고 판단을 하는 것은 어떤 판단을 내리더라도 무의미한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으로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

종교개혁의 단초가 된 루터가 가톨릭 신부였다는 사실은 그래서 유의미하다. 그가 신부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가톨릭을 사랑하지 않았었다면 그의 주장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그의 주장이 피상적인 것에서 나왔다면 그의 주장은 그 내용이 아무리 합리적일지라도 타당하지 않은 내용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개신교 교회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목사가 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내가 개신교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글을 쓴다면 그것은 부적응자나 불평불만을 가진 자의 한풀이 이상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내게 모든 것이었고, 목사가 된 후에도 나는 내 교회가 전부가 아니라 한국교회에 성숙한 일꾼을 공급하는 교회를 목표로 삼았다. 좋은 교회라고 소문이 난 교회에 대해서는 직접 가서 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찾아다녀 보았고, 실제로 몇몇 교회의 경우는 수년간씩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래도 내가 모든 교회를 다 가본 것은 아니고 모든 교회들에 대해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런 나의 순례의 여정에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고 주님의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주님은 나로 하여금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도록 교회로 인도하시고 목사들을 만나고 보게 하셨다. 특히 책들을 통해 직접 가서 보고 느끼지 못한 교회들까지 알게 하셨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두 가지 사실이 중요하다. 먼저 알아야 한다. 두 번째로는 사랑해야 한다. 나는 사형수 어머니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내가 어떤 것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이 되기 쉬운가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사형수의 어머니는 모든 죄수들을 아들처럼 사랑한다. 이 말은 그 사형수 어머니는 모든 죄수들을 이해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형수의 어머니가 되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죄도 없어진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이 사형수의 어머니는 비로소 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판단하고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잘 모르면 어쩔 수 없이 낙인을 찍고 미워하고 적개심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 판단은 결코 정당한 판단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판단을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정의의 이름으로 모르는 것에 대해 낙인을 찍고 혐오와 배제라는 가장 손쉬운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엠마뉘엘 레비나스는 십계명의 제6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피상적인 판단으로 결정한 혐오와 배제는 타인을 죽이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얼굴을 중요하게 여긴다. 타인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타인의 얼굴을 보고 피아를 구분하고 적을 말살하려는 인간의 본성은 결국 전체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개신교 교회들의 특성이 ‘포비아’가 된 것은 바로 피상적인 지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개교회주의에 함몰된 이기적인 교회들에서 보게 되는 전체주의의 한 단면이다. 그들은 그러한 ‘포비아’들을 기제로 삼아 내부결속을 다진다. 그런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제6계명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포비아(Phobia, 공포증)는 적개심에서 비롯되고 적개심을 강화한다. 그것은 매우 무섭고 위험한 일이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선의 진영으로 포용하고 그 반대로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은 악의 진영으로 내몬다. 결국 악의 진영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은 죽이거나 죽어야 한다. 잘 생각해보라. 작금의 교회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가. 그런 사람들이 불상의 머리를 박살내고, 부처님 오신 날 절에 가서 찬송가를 부른다. 무지개 축제에 나가 기도회를 하고, 할랄 식당이 생기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들이 전체주의를 형성하려는 것이다. 전광훈 류의 인간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자기 입으로는 본회퍼 목사임을 표방하지만 실상은 히틀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그러한 판단을 하게 되는 이유를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 많은 정보를 얻은 후에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다른 이들을 먼저 이해하고 포용하는 일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러한 과정을 생략하고 쉬운 결정을 하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은 아이큐가 좋다거나 공부를 잘 하는 것이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전에 '생각하는 힘'이라는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우리는 머리가 좋다는 것의 정의를 새롭게 내릴 필요가 있다. 머리가 좋다는 것을 결코 공부를 잘 하거나 아이큐가 좋은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생각하는 힘으로 머리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사형수의 어머니와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결국 머리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공부 잘 하고 아이큐가 좋은 사람들이 판단을 주도하게 되면 히틀러와 같은 전체주의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 교회와 같이 집단이기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 자신의 구원만을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사람들이 된다.

오늘날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된 것도 바로 피상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집단주의 의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전광훈의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예라는 사실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 이유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는 그렇게 사람들을 피상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들로 만든다. 교회가 개교회주의에 함몰되었기 때문이다. 목사들이 권력에 함몰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교회와 목사들이 돈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사랑을 기반으로 무조건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이 철칙이 되어야 한다. 먼저 상대방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품고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톨릭에 대한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았다. 개신교 목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는 그대로 가톨릭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맞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성령도 더 이상 어쩌실 수가 없다. 성령에 대한 이해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돈을 미워하는 교회가 되어 그 안에서 만나자는 결론을 제시했다. 돈을 미워하는 교회는 생각하는 힘을 가지게 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을 미워하려면 의식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생각할 수 있는 힘이 그 기반이다. 개신교는 물론 가톨릭과 정교회와 신자들의 교회가 그곳에서 만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보여주자. 복음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경륜이다. 머리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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