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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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3.16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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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지상에 몸푼 말씀-2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박재삼, 아득하면 되리라)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대사제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다. 이 때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그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히 말해 주었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다시 묻자 요한은 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요?" 그들이 다시 물었을 때 요한은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해 줄 말이 있어야 하겠으니 당신이 누군지 좀 알려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 이렇게 다그쳐 묻자 요한은 그제야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하고 대답하였다. (요한 1,19-23)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요한 1,20) 세례자 요한은 조금도 숨김 없이 담백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한 단계 낮추어 다시 한번 더 묻는다.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1,21) 나중에는 예언자냐고 묻기도 했지만, 요한은 자신이 이도 저도 아니라고 분명하게 대답한다. 그의 말투는 주저함이나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도 대사제와 레위지파 사람들은 계속 다그쳐 물었다. 그들의 궁금증이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요한복음이, 유다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으며, 이제는 아예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구분되었던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요한은 세례자 요한을 예수님의 때를 준비하러 온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1,23) 정도로 매김해 두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 뜻을 전하기 위해 요한은 대사제와 레위지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질문하고, 세례자 요한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도록 한다. 세례자 요한은 그 무엇도 아니다.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 (1,27)이다.

별 볼일 없는 의인과 무신론자

세례자 요한이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하자 유다인들은 즉각 “그렇다면, 당신이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가,” (1,25) 하며 따지고 들었다. 세례란 죄를 용서하는 정결예식에 속했기 때문이다. 대사제는 자신들의 고유한 권한으로 성전에서 정결례를 주관하며, 그 대가로 제물을 제 몫으로 챙겨왔던 것이다. 그런데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무보수로 세례를 베풀자, 줄어든 수입 때문에 불만이 대단했을 터였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은 바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고 있다고 답변한다(1,31).

요한은 값싼 세례로 인기 스타가 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세례자 요한은 대사제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대사제들은 하느님의 성전을 장악하고 있으며,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지성소는 왕정시대에 다윗이 들어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바로 그 하느님의 거처이다. 그러므로 대사제들은 성전을 장악할 뿐 아니라, 하느님마저 독점하는 막강한 종교적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그들이 위세를 부리면 부릴수록 사람들은 그들을 무신론자로 여겼다.

주로 사두가이파에 속했던 그들은 천사와 육신의 부활을 믿지 않았으며,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야말로 역설과 모순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 물론 공적 권위도 재산도 소유하지 않았으며, 엘리야와 같은 종교적 권위도 거부하였고, 예언자라 자처하지도 않았으며, 단지 메시아를 준비하는 ‘소리' 로만 남아 있으려 고집했다. 그러나 공관 복음서를 쓴 사람들은 한결같이 요한을 위대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 기록했으며, ‘의인’ 이라 불렀다. (마태 11,7-14; 루가 7,24-35 참조).

 

예수의 세례, 지오토 디 본도네, 1304-1306
예수의 세례, 지오토 디 본도네, 1304-1306

 

어버이에서 주인으로

그런데 우리 교회의 사제들은 어떠한가? 예수님이 사제 출신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초기 교회에서는 애초부터 사제가 없었다. 방랑 설교자들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지방을 돌아다니며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였으며, 교사와 예언자들이, 또는 감독들이 신도들을 가르치고 보살폈다. 이들은 세상이 주는 권력에 따라 사목하지 않고, 섬김의 자세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였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그리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함께 성찬례를 행하였다.

나중에 생긴 사제 역시 자신만이 전례를 행할 수 있다는 독점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모든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사제인 겨레'인 까닭에 주례자는 단지 공동체를 대표해서 전례를 행할 뿐이었다. 그들은 각자 받은 카리스마(성령의 은사)에 따라 직분이 나뉘어져 있었지만, 신분적으로 평등하였다. 그러나 중세기에 들어와 사제는 교회법에 따라 서품을 받았고, 서품받은 자만이 성사(聖事)를 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제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엄밀히 구분된 성직자 신분으로 굳어졌다.

이제 사제는 대사제인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과 평신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중개자)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죄를 묶어 두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누군가 죄를 짓고도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받지 못하면 자연히 구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인간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기도 하고 막을 수도 있다면, 그의 뜻과 상관없이 사제의 권위는 엄청나게 커질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야 눈앞에 있는 사제가 더 크게 보이지 않겠는가.

사제는 직업이 아니다

그래서 사제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제 권위를 주장하게 되면, 사람들은 이를 성직주의라고 비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사제가 들어앉아 버리고, 사제의 주변은 성역화되고, 그의 언행은 신비화된다. 사제관에 앉아서 세상을 논하고 하느님을 깨닫는다고 믿는다. 전례시간에는 한 손으로 하느님을, 다른 한 손으로 평신도들의 손을 잡고 하늘과 땅을 연결시킨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런 우리들의 사제가 구원받는 길은 단 하나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라고 말하고, 행동하고, 성찰할 때이다.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이 그리스도의 신발끈도 매어드릴 자격이 없다고 느끼고, 평신도들과 평등한 자리로 겸손되게 내려올 때이다.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우리 모두는 죄많은 인생이며 아직도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는 도반(道件, 길동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한번 윗물을 마셔본 사람은 탁한 아랫물을 찾기가 무척 어려운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세례자 요한은 세 번의 유혹을 거절하였다. 메시아, 엘리야, 예언자가 될 기회를 거부하였다. 참된 사제는 자신을 ‘누구’라고 말하기에 앞서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한다. 참된 사제는 내가 무엇이 되고자 열망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점점 작아지고 내 안의 그리스도가 점점 커져야 함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성스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몸으로 사는 사람이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세례자 요한의 하느님,
세례자에게 겸손을 배우게 하시려고
당신을 비워
우리가 사랑으로 채우게
내버려 두시는 하느님. 
당신이 속뜻을 알아 
우리도 사제처럼
사제도 우리처럼
자기를 주장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당신만을 선포하게 하소서.
생존을 위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자기 피알(PR)은 자기가 해야
남이 알아 준다고
아우성 치는 세상에서도
색다르게 사는 사람 하나쯤
있어야 구원이 된다고,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교회라고
부끄럽지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저희 마음에 내리소서.
나의 자비로우신 하느님,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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