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두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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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두드리다
  • 도로시 데이
  • 승인 2016.07.1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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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1:시작은 항상 흥분된다

[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1:시작은 항상 흥분된다]

러드로우가에 위치한 방이 2개 있는 내 작은 아파트의 창가에 앉아 이렇게 글쓰기를 하는 것은 나에겐 기쁨이 된다. 이 아파트는 아직 널로 막지도 않고 또한 철거되지도 않고 있는 뉴욕의 오래된 빈민 지역(로우어 이스트 사이드)에 있다.

날씨는 매우 덥지만, 동쪽에 위치한 창문을 통해서 보면 헐벗은 나무와 가죽나무(천국의 나무)가 있는 뒷마당이 보인다. 그 옆 마당 아래쪽엔 단풍나무 한 그루와 약간의 관목들이 있다.

방금 페인트칠을 끝낸 방들에 햇빛이 가득찬다. 문 옆에 있는 다른 두 개의 방들은 마당으로 통한다. 이 네 개의 방안엔 현재 우리 다섯 명이 있는데, 나와 방금 출감한 한 소녀와 가출한 17세 여학생과 지적인 결단의 삶이 행동으로 흘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진지한 21세의 대학생과 불구자들과 빈곤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몬트리올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한 병원에서 휴가로 이곳에 온 한 소녀가 있다.

그렇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글을 쓰는 것은 기쁨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제약이기도 하다. 비록 헐벗었을지라도 가죽나무는 여전히 어두컴컴한 뉴욕의 협곡 같은 뒷마당에서 약간의 공기와 햇빛을 찾아 앙상하게 뻗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 그 집엔 무화과나무들이 있는 뒷마당,
쥐똥나무 울타리들이 있었으며, 과부눈물나무들도 있었다

내 마음은 과거로 가고 있다. 나는 뉴욕 동부 15번가와 A가에 있는 방이 4개 있는 이 아파트와 너무도 비슷한 한 아파트를 기억한다. 피터 모린과 함께 가톨릭 일꾼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때의 낡은 집들은 지금은 헐렸지만 그 당시엔 좁은 길을 따라 그런 집들이 죽 늘어서 있었으며 대부분 독일인과 이태리인들이 살고 있었다.

나는 남동생인 존과 스페인사람인 그의 아내 테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의 부엌은 가죽나무는 없지만 비록 잡목이긴 해도 무화과나무들이 있는 뒷마당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나무들은 이태리인들이 세심하게 키우고 보살폈다. 그들은 겨울의 추운 날씨에 대비해서 건초와 삼베로 나무들을 감싸주었다. 여름에 그 나무들은 열매를 맺었다. 복숭아나무들과 나무만큼 높이 자라는 쥐똥나무 울타리들이 있었으며 과부눈물나무들도 있었다. 페튜니아와 금잔화는 다양한 색채와 유쾌한 향기를 주었는데 비가 와서 이웃들의 요리하는 냄새를 씻어내고 나면 더욱 더 향긋했다.

우리는 3년째 불황기에 있었다 루즈벨트가 막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모든 50대의 성인 미국사람들 총 1200만 명의 인구 중에 5명당 1명꼴로 실업자였다. 공장에서는 연기가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당 잡힌 집과 농장을 찾을 권리를 상실하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쫓겨났으며 이미 포화상태인 구호자들 속으로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뉴욕엔 더러워진 옷차림의 수많은 사람들이 빵 배급을 기다리며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도시의 길거리를 따라 강가에 있는 대부분의 공터에는 불이 나면 속수무책인 날림으로 지은 판자촌인 실업자 수용 주택이 있었다.

피터 모린과 첫 만남
짧은 손가락과 큰 손, 낡은 옷과 유쾌한 입술

피터 모린

우리의 사회적 이상들을 실행할 기회와 함께 절박한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흥분의 분위기가 젊은이들과 이상들을 지닌 모든 사람들을 들뜨게 하였다. 우리는 만났고 지금이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라고 느끼며 끝없이 말했다. 나는 방금 워싱턴에서 돌아왔다. 그곳에서 나는 공동선을 위한 실업자위원회가 주관한 굶주림의 행진과 미국농민연합회에 관한 기사를 썼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언론인으로 살아왔고 사회질서에 관한 자유기고로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부엌에 앉아서 실업자들에 관한 책(아마도 소설이었던 것 같다)을 읽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테사는 저녁을 막 준비하고 있었다. 존은 일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 당시 그는 허스트 신문사의 조판공이었다). 그들은 둘 다 스무 살이었으며 첫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사는 온화하고 밝고 또 성숙해 보였다. 존은 좀더 내성적이었다.

테사는 언제나 매우 친절했으며 그래서 문간에 있는 남자를 기쁘게 맞았다. 작은 키에 풍채가 좋은 한 남자가(뒤에 알았지만 그는 57세였다. 그러나 나의 첫 인상은 그가 더 나이들어 보였다) 들어오자마자 즉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그는 말을 끝낸 그 자리에서 다시 대화를 무심코 스스럼없이 시작하였다. 그는 회색의 분위기를 풍겼는데, 회색머리칼은 짧고 헝클어져 있었고 회색눈과 강하게 생긴 얼굴 모습과 유쾌한 입, 막노동과 같은 실제로 힘든 노동을 했을 짧은 손가락과 큰 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모양과 세련됨이 없어진 낡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깨끗한지 아닌지를 말하기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나 선동가이며 가톨릭일꾼운동의 창시자인 피터 모린은 뒤에 알았지만 늘 깔끔했다.

테사는 그녀의 일을 계속하였으며 그 새로운 방문자는 내 앞에 서서 존이 “쉬운 에세이”라고 이름지은 그의 글 중에 하나를 열정적으로 낭송하였다:

사람들은 연방정부가 경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길 요구하면서
워싱턴에 간다. 반면에 연방정부는 결코
사람들의 경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하지 않았다.
토마스 제퍼슨은 작은 정부가 더 좋은 정부라고 말한다.
만일 작은 정부가 있다면 더 좋은 것이고
정부 중에서 가장 좋은 정부는 자치정부이다.
정부 중에서 가장 좋은 정부가 자치 정부라면
조직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자치 조직이다.
조직가들이 비조직인들을 조직화시키려 할 때
그 자신들은 스스로를 조직화하지 않는다.
조직가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스스로를 조직화하지 않는다.
아무도 스스로를 조직화하지 않을 때
그 어떤것도 조직화되지 않는다.

그는 실제로 그의 요점을 말할 때 반복을 하면서 이런 식으로 말하였다. 그는 자유로운 운문(시) 같이 소리 내어 이 요점들을 너무도 단순하게 표현하였다(그리고 오늘 날까지 사람들은 “피터의 시들”에 대하여 말한다).

내 어린 딸인 타마는 옆방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이는 홍역에 걸려 있었고 오렌지 쥬스와 나를 원했다. 한편 피터는 청취자와 제자를 원했기에 방금 들어온 의사에게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의사가 떠났을 때 그는 배관공과 계기를 읽고 있던 가스 계측자, 그리고 부엌 조리대에 있는 테사와 부엌 거울 앞에서 면도를 하고 있는 존에게 계속 말하였다.

나는 그가 실제론 나를 보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테사로부터 알게 되었다. 테사는 놀랄만한 평온함을 유지했지만 나는 혼란스럽게 느꼈다. 의사, 타마, 그리고 피터는 모두 나의 집중된 주의를 이 한순간에 원했지만 나는 피곤했기에 우둔해졌다. 피터는 내가 워싱턴에서 돌아왔는지 알기 위해서 몇 번 찾아왔는데 테사는 그를 환영하였지만 깐깐한 미국인인 존은 그가 내가 만나길 원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저 유니온 광장에서 온 정신 나간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혁명의 이론 없이 어떤 혁명도 가능할 수 없다”
‘녹색혁명’ 즉 땅으로 돌아가는 혁명

피터는 내가 가톨릭 잡지에 기고한 기사들을 읽었다고 테사에게 말했으며(프랑스식 어투 때문에 처음엔 그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 나한테 “사고의 명료화”를 이루기 위해 신문을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하기 위해서 왔다. “명료화”는 그의 프로그램에서 첫 번째 ‘중요한 부분’이었다. 인간은 행동하기 전에 생각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공부해야 한다. 그는 “혁명의 이론 없이 어떤 혁명도 가능할 수 없다”는 레닌의 말을 인용했지만 정작 그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산업을 강화시키는 붉은 혁명이 아니라 ‘녹색혁명’ 즉 땅으로 돌아가는 혁명이었다. 그가 ‘사람들이 워싱턴에 가다’라는 글을 전달한 것은 내가 막 워싱턴에서 돌아왔기 때문이었으나, 요리사, 접시닦기, 간호사, 그리고 엄마, 또한 작가로서의 나의 혼합된 역할 때문에 그가 말한 것을 즉시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처음으로 만난 날 피터가 말했던 내용을 내가 참으로 알게 되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세 가지 주제를 말했다. 즉 사고의 명료화를 위한 신문 창간, 환대의 집 시작, 그리고 공동 농장의 조직이었다. 나는 그 당시 환대의 집과 공동농장이 나와 연관성이 있다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신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내 아버지와 세 명의 남동생들은 모두가 신문 일에 종사하였었다. 내가 11살이었을 때, 우리 아이들은 작은 가족 신문을 만들기 시작했었다. 우리 모두는 글쓰기를 좋아했으므로 나는 내 주위에서 본 것과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주관적으로 글쓰기를 일찌감치 배웠다.

타마가 좀 나았다. 그 아이는 며칠간 인형과 새끼고양이와 찰흙 놀이에 만족하였고 피터는 내가 집에 돌아와서 틀어박혀 있는 때를 이용하여 계속해서 나를 가르쳤다.

“가난한 사람들은 환대를 잘 하는 사람들이다”
“20세에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없는 것이고
30세에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머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한 프랑스 저술가의 “20세에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없는 것이고, 30세에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머리가 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길 좋아하였다. 나는 대학시절엔 사회주의자였으며 20세기 초엔 공산주의자였고 1927년 이후 가톨릭 신자가 된 이래로 가난과 실업에 대하여 매우 명확한 관점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할 내 자신의 소명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교회에 대하여 어떤 의심도 없었다. 교회는 성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세워졌으며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전날 밤에 세 번씩이나 스승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교회를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좋은 물고기이든 나쁜 것이든 가득 채워서 끌어당기는 것에 비유하였다. 내 비(非)가톨릭 친구들 중 한 명은 “포함된 것”이 “허풍뿐인 쓸모없는 복어들이고 적은 수의 상어들”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피터 모린은 내가 뉴욕의 로우어 이스트가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잘 이해 할 수 있었던 개념인 환대에 관하여 자기의 생각들을 종종 나에게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환대를 잘 하는 사람들이다. 스페인사람인 내 남동생의 장모는 “항상 한사람의 몫이 충분히 더 있다”고 말하곤 하였다. “모든 사람이 조금씩만 덜 가지면 된다.” 가난한 가족들은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가족들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피터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너무나 선명하고 합리적으로 들렸다:

가톨릭 실업자들은
‘시립시설’에 보내져서는 안 된다.
가톨릭 실업자들은
가톨릭 환대의 집들에서 환대를 받아야 한다.
가톨릭 환대의 집들은 유럽에선
호스피스(여행자 숙소)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콘스탄틴 시대 이래로 유럽에선
호스피스들이 있었다.
호스피스들은 무료 손님들을 위한 집이었으며
호텔들은 유료 손님들의 집이었다.
그리고 유료 손님들을 위한 집들과 호텔들은 매우 많아졌고
무료손님들을 위한 집과 호스피스들은 부족하였다.
이처럼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환대도 상업화되었다.
그러므로 환대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피터는 하느님의 음유시인
인생에서 자기의 소명을 발견한 사나이

피터의 다른 생각들 중 어떤 것들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의 시들은 아마도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의 감각과 정신을 사람들이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하느님의 음유시인이라고 생각했으며 광장과 길거리모퉁이로 가서 청취자들에게 시를 반복함으로써 가르쳤으며 분명히 그들의 주의를 끌었을 것이다. 그는 타고난 교사였기에 그의 생각들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그를 둘러싼 젊은 학생들과 실업자들에게 제안하여 교송성가 중 하나인 콜럼버스 서클을 함께 불렀다. 피터가 “주고 취하지 않는 것”이라고 노래하면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그들이 응답한다. 이런 식으로 거의 ‘쉬운 에세이’들을 모두 노래하였다.

그는 행복하게 살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묘사했던 것처럼 들뜨거나 쾌활하진 않았으나 진실로 행복한 사람이었으며 인생에서 자기의 소명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행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갔으며 확신을 가졌다. 물론 다른 이들도 그와 같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또한 그 사랑을 보이길 원하면서 인생에서 과업을 찾고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원한다고 확신했다.

피터는 사상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졌고 그의 이런 믿음을 사람들이 느끼게 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오늘날 젊은이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번지는 자기비하(쓸모 없다는 느낌)를 극복하고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었다. 만일 그가 나에게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가서 이 생각들을 말하라”고 했다면 나는 모든 공포를 극복하고 그러한 어리석은 행동을 시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그러한 행동이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며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이 실패를 받아들여 승리로 변화시키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렇게 시도했을 것이다. 이처럼 실제로 피터는 그의 생각들이 지닌 힘을 내가 크게 믿도록 해 주었다.

피터는 오직 사상의 힘과 아름다움에 의해서
사람들이 따르길 바랬다

확실히 피터의 겉모습에는 청취자들에게 강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지저분하고 펑퍼짐하고 어울리지 않는 양복은 책과 팜플렛으로 불룩하였다. 그래도 그는 전혀 부주의 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변함없이 중절모(테가 넓지 않은)와 (거칠게 다림질한) 셔츠와 넥타이 그리고 억센 신발을 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턱수염도 없었고 샌들도 신지 않았으며, 모자를 쓰지 않는 광적인 모습도 아니었다. 즉 그는 사도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또한 그는 개인에 대한 숭배를 주창하지 않았다. 피터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영성의 수위성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경청할 때 행복해 했으나 그가 행사하는 어떤 영향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사상의 힘과 아름다움에 의해서 사람들이 따르길 바랬다.

가난을 예로 들자. 프란치스코회 문학서들에서 그것은 얼마나 빛나고 있었으며 또한 사람들은 가난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환상을 가지고 있는가! 그러나 피터는 가난을 살았다. 그는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다. 그는 하룻밤 묵는데 50센트를 내는 바우어리에 있는 낡은 호텔에서 살았다. 그는 돈이 있을 때 바우어리의 ‘말 시장’의 값싼 카페에서 스튜와 약하지만 뜨거운 커피를 매우 맛있게 먹었다. 그는 스프와 빵으로 사는데 익숙해 있었다.

ⓒ한상봉

신문 발행,
“자금 없이 어떻게 가능하지?”

그의 생각들 중에서 가장 먼저 나를 매혹시킨 것은 신문 발간이었다. “그러나 자금 없이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해답을 알기를 원했다.

“가톨릭교회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결코 돈이 필요 없다”고 피터는 응답하였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다. 만일 당신에게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기꺼이 일을 하려 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느님께선 관대함에 있어 결코 둘째가 되지 않으신다. 자금은 어떤 식으로든지 마련될 것이다.”

그가 정말로 이렇게 말했던가? 지금은 확실치 않지만 그가 돈에 대한 내 질문을 넘겨버렸다고 생각된다. 돈은 교회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일이었다. 나는 로즈 호손 라드롭의 전기를 읽고 있었다. 그녀는 19세기 미국의 소설가인 나타니엘 호손의 딸이었다. 로즈는 남편과 함께 1891년에 개종하였다. 그녀는(그 당시엔 그러한 기관들이 드물었다) 이스트가에 있는 어둡고 공기가 안 좋은 3개의 지하 방에서 가난한 이들과 집 없는 이들을 위한 암 병원을 시작하였다.

피터가 원하는 일을 내가 시작한다면 그녀가 시작했던 것처럼 보잘 것 없는 것이 될 것이었다. 실제로 로즈 자신이 독감에 걸렸을 때 그녀의 병원의 첫 환자가 그녀를 보살펴야 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출발로부터 그녀의 일은 지금 6개의 병원들이 될 때까지 늘어났으며 미국 전역에서 도미니코 수녀회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 도미니코 회의 수도복을 입은 새로운 수녀회가 그 결과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로즈 호손 라드롭에 관하여 읽고 또 지금은 피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너무나 강한 영감을 느꼈기 때문에 교회에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상당히 믿게 되었다. 나는 바야흐로 곧장 일을 시작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벌써 타자기와 식탁과 많은 양의 종이와 많은 기사거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인쇄업자를 찾아서 첫 판을 내고 길거리로 나가서 그것을 파는 것뿐이다. 시작은 항상 흥분된다.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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